3월 5일 수 _ 2025년
우리도 미키처럼 살아갑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헤어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누군가를 사랑했던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그 후의 저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달라집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꿈에 좀처럼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꿈을 좇는 저는 번번이 죽습니다.
연이은 죽음을 통해 저는 비로소 저를 찾아갑니다.
반복되는 죽음이 제게 가져다준 것은
자유입니다.
제가 원했던 것을 손에 넣고 자유로워지면 좋으련만
원하는 것을 잡지 못한 텅 빈손은 자유스럽습니다.
그 손에 묵직하고 값비싼 것이 들려져 있었다면 그 손은 자유롭지 않았겠지요.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저는 영화 <미키 17>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었다 태어나는 얘기라고.
심지어 목전에서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영화라고.
그 죽음은 적게나마 갖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는 죽음이고,
그런 죽음은 영웅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미키18’은 죽음이 두려웠지만 죽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시 태어나서도 아니요, 자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미키가 수많은 시도와 실험에 죽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매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으면서 살아갑니다.
사랑에 죽고,
꿈에 죽고,
관계에 죽고,
죽고, 죽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미키17>의 엔딩에 미키는 프린트 기계를 폭파합니다.
이제 미키는 더는 죽지도 다시 태어나지도 않을 겁니다.
비로소 미키는 완성되었고,
‘미키’에서 숫자를 떼어내고
‘미키 반즈’라는 이름을 되찾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죽고, 죽으면서
살아갈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죽으면서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