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 참 '시' 같습니다.
그저께 짧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손님이 요청하신 건데요,
인터뷰 질문은 딱 이거 하나였습니다.
“<자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돌연 훅 들어온 질문에 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자립’이라...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손님은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보육원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보육원을 나오게 되는데,
갓 스물이 된, 아직은 성인이란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을 ‘자립’이란 말로 뚜렷한 지원도 없이 사회에 내모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취지를 이해한 저는 인터뷰에 이렇게 답변을 드렸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 이 사회에서 사는 한 진정한 ‘자립’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 친구, 동료, 애인 등으로 혹은 학생, 군인, 간호사, 회사원 등등의 직군에 속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얽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로빈슨 크루소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한편 이러하기에 우리는 더더욱 ‘자립’을 해야 합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홀로 자립한 이들이 모여 사는 사회라면 진심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흡한 저의 답변을 녹음한 손님이 떠나고,
저는 곰곰이 ’자립‘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본 드라마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그 드라마는 바로
<미지의 서울>
드라마 카피가 불안합니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이 드라마 카피에 '자립'이란 소제목을 달아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에 대해서는 자잘하게 할 얘기가 참 많지만 작가님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 때문에 박해영 작가를 참 좋아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합니다.
한데 <미지의 서울>에서 박해영 작가의 정서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작가를 찾아보니 이강 작가. 이강 작가의 전작은 KBS에서 2021년 – 아직 윤석열이 당선되기 전에 – 방영했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는 <오월의 청춘> 으로
<오월의 달리기>라는 동화책을 원작으로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엄밀히는 원작이라기보다는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는 것이 맞겠네요.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 드라마가 5.18 민주 항쟁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드라마라는 점입니다.
<미지의 서울>과 <오월의 청춘>을 쓴 이강이란 작가가 너무나도 궁금해집니다.
심지어 저는 이강 작가가 ’한강 작가‘의 부캐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독보적인 작가로 보입니다.
여튼 그만큼 특별한 작가님이 <미지의 서울>을 통해 송곳이 튀어나오듯이 등장하셨습니다.
저는 <미지의 서울>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드라마 속 인물이 자립하기 위해 방에서 나오는 이야기라고.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모조리 그러합니다.
주인공인 미지가 과거에 그러했고, 현재에는 미지의 쌍둥이 미래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미지를 좋아는 하지만 오해로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을 간직한 호수가 그러합니다.
그들은 모두 방에 들어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상처, 깨진 꿈, 직장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 등등으로 세상으로 나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또 있습니다.
단역으로 등장하는 미래의 직장 선배 역할인데요,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 내내 나오는 장면이 없다가 회사 측과 미래의 갈등이 고조되는 드라마 말미에 방 안에 있다가 방 밖으로 나오는 장면은 소름이 쫙 끼치는 명장면이었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 미지도 자신의 꿈이 무너지고 방 안에서만 지내는 나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방에서 나온 미지는 주어진 일을 씩씩하게 해내며 밝게 지내지만,
밝은 빛을 찾아 서울에 사는 미래는 다시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남자 주인공 호수도 귀가 안 들리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맙니다.
맞아요. 이 드라마는 걸어 잠근 방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방에서 홀로 있는 것이 자립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것이 진짜 자립이라 말하는 드라마가 바로
<미지의 서울>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