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8일 _ 그(녀)에게 죽임 당한 그(녀)에게
'향연' 모임에 나를 비롯한 몇 명은 당연히도 헤어진 연인들이다.
(모임 향연은, 플라톤의 '향연'을 공부하면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임이다)
어떤 분은 사랑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우리에게 사랑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를 묻는 분도 계셨다.
어떤 의미로든 우리에게 '사랑'은 필요한 거다.
근데 애석하게도 '사랑'이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사랑'이 뭐지?
혹은
사랑이 뭐길래?
다행히도 나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사랑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사랑은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거다.
'향연' 모임에서 사랑을 이야기하자고 제안을 하는 순간
나는 이 제안이 매우 비효율적이고도 그리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사랑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말이다.
'향연' 모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달리 말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이 맺은 관계의 사람들을 조금씩은 사랑하고 있다.
거기에 성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다 나의 관심 대상이다.
이들과 '사랑' 얘기를 하는 것 또한 또 다른 '사랑' 행위라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이번 파우사니아스 강연 중에 거론된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아! 내가 사랑하는 영화.
아니 엄밀히 말해,
내가 사랑하는 아델이 나오는 영화다.
사랑을 찾아 떠나는 아델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요, 일리아드의 오딧세이다.
앞으로 그녀가 행위 할 사랑의 파도는 격렬하고 집요하여 이를 지켜보는 우리 또한 흠뻑 적실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제 어서 영화 속 아델을 쫓아가보자.
게이남자친구에게 이끌려 게이바에 가게 된 아델.
(아델은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 남자에게서 만족을 못 느끼고 여자친구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이다)
그곳에서 온몸에 문신과 피어싱이 곳곳에 된 얼굴을 한... (심지어) 늙은 남자가 아델에게 접근한다.
이 늙은 남자는 충분히 극혐할만한 분위기의 남자다.
(물론 나는 이 할아버지가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문신&피어싱 할아버지는 아델에게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성 따위는 상관없는 거라고.
문신&피어싱 할아버지는 이 말을 하고는 곧바로 젊은 남자에게 껄떡이며 자신의 말을 행위로 옮긴다.
(이랬기에 이 할배는 멋진 거다~)
그리고 곧 아델은 엠마를 만난다.
푸른 머리를 한 엠마는 미대생이다.
기나긴 세월을 품고 있는 나무 아래 둘은 첫 데이트를 한다.
엠마는 아델을 그려준다.
첫 데이트에서조차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엠마가 그림 그리는 자신과 사랑하고 있음을 내포한다.
엠마가 아델을 바라보는 첫 시선이 그림을 그리기위해 바라보는 피사체인 것이다.
(사랑은 정말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이 모습은 둘이 동거를 하면서 엠마가 지인들에게 아델을 소개하길,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뮤즈라 소개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언 듯 지나칠 수 있는 소개멘트이지만 이 말에서도 엠마의 의식을 알 수 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예술이 전부라는 얘기다. 곧 자신의 예술과 하는 사랑이 최대 사랑이라는 얘기다.
엠마에게 아델은 예술적인 영감을 주는 존재, 그림을 그리는 피사체라는 얘기인 거다.
(이것은 곧 아델에게는 재난으로 다가오게 된다)
더 나아가 엠마는 자신을 확실히 소개한다.
샤르트르를 거론하면서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말을 한다.
자신이란 주체가 얼마나 완고하고 큰 성전인지를 으르렁거리며 하는 선언인 거다.
아델은 주저 없이 그 완고하고 큰 엠마라는 성안의 뮤즈가 된다.
그 성안은 극혐의 문신&피어싱 할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동성애고 뭐고 문제 될 거 없는 세계다.
아델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당당히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녀가 본질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델과 엠마가 부모에게 각각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도 매우 흥미롭다.
저녁을 먹고 섹스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델의 집에서 하는 섹스와 엠마의 집에서 하는 섹스가 각각 다르다.
부모의 반응도 사뭇 다르다. (아델과 엠마의 살아온 궤적까지 가늠할 수 있겠다)
둘은 동거를 시작한다. 말 그래도 아델은 엠마의 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같이 살게 되면서 엠마는 성을 자주 비우게 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엠마는 이미 다른 뮤즈를 만나고 있다.
(쉬운 핑계가 밤새 작업한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변화를 간파하기란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오히려 아델이 간파한 것은 다른 뮤즈의 탄생이 아닌, 자신을 멀리하고 있는 엠마의 본능인지 모른다.
엠마는 아델을 자신에 맞추려 한다. 자신과 닮아지길 원한다.
글을 쓰라는 둥, 창작 활동을 하라는 둥...
창작활동이 최고 가치인 엠마에게는 창작활동을 하지 않는 아델은 더 이상 뮤즈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델은 엠마의 성에 살면서 남자를 만난다.
(물론 그조차 엠마에 대한 사랑이다. 아델의 사랑이 흔들렸다면 여자를 만나지 않았을까?)
이를 발견한 엠마는 가차 없이 아델을 쳐낸다.
자신의 삶에서 나가라고 고함을 지르고, 연인 사이에서는 해서는 안 될 '창녀'라고 말로 후려치면서 말이다.
이 장면은 처절한 전쟁씬처럼 보인다.
재난 영화의 절정에 치닫는 가장 쇼킹한 장면처럼 소용돌이치듯 몰아붙인다.
엠마의 그 완고하고도 단단한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장면이다.
무너지는 성의 파편에 온몸이 으깨지는 아델의 모습에서 나는 울지 않을 수 없다.
그 순간 엠마는 아델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기회를 엿보다 사정없이 난자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없이 쏟아붓고 숨을 몰아쉬는 엠마의 모습은 놀랍게도 이미 감정의 여진이 지나간 후다.
이 모습이 아델의 입장에서는 더 쓰리고 아프다.
그 후 아델은 죽었으나 자신의 죽음을 인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혼령처럼 이승을 떠돈다.
유치원 보모인 아델이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우는 장면이 그녀의 본질을 잘 나타내준다.
그 후 그녀가 엠마를 만난 두 번은.
자신이 살던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산산이 결딴난 자신의 시체를 목격하는 순간이다.
영화 마지막,
엠마의 그림이 전시된 미술관(그곳이야말로 엠마의 성전이다)에서 나온 아델은 담배 한 대를 문다.
나에게 그 모습은 마치 석양의 건맨과도 같다.
표표히 어딘가로 걸어가는 아델의 뒷모습에서 나는 다시 그녀가 부활할 거라 확신한다.
더 나아가 부활한 아델은 엠마처럼 완고한 성전을 쌓고 처박히지 않을 거다.
아델에게 엠마는 사랑을 알려줬지만 결코 둘은 같은 사랑을 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엠마는 아델에게 가장 따뜻하지만 블루일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엠마의 머리 색깔은 이미 블루도 아니다)
라스트 표표히 걸어가는 아델의 뒷모습이 건맨인 이유는,
아델은 전시관을 나오는 순간 자신 안에 살아있는 엠마를 쏘고 나온 것이다.
총을 날렵하게 뽑아 상대를 죽인 건맨은 느긋하게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떠나는 것이다.
상대 앞에 선 건맨이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것처럼,
아델도 엠마를 죽인 다음에야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걸어가는 아델의 뒷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아델의 사랑은 아름다워서?
아니
아델이 사랑을 끝났기 때문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사랑을 끝낸 모든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