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 세상에 색깔이 없는 건 없다. 그 투명하다는 유리도 사이사이를 자세히 보면 알록달록한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이 보인다. 물도 그야말로 투명하지만 그 사이로 온갖 색깔이 비취고, 하늘에서 내리는 물인 비는 어느 순간 무지개를 만들어 다양한 색깔을 품고 있음을 드러낸다. 세상에 정말 투명한 것이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뭐든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참았다. 늘 겸손해야 된다고, 나서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렇게 나를 가뒀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 색깔을 점점 잃어간 것 같다. 아니 그 색깔을 내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담아 꿈속의 꿈속의 꿈에 있는 금고에 잘 넣어두었다. 나 자신도 잊어버리도록. 그 색깔이 어떤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저 부모님이 하라는 것을 하고 하기 싫으면 짜증을 냈다. 그것도 잠시 곧 나는 순종적인 아이가 되었다.
학교에 진학하고도 나는 조용했다. 친구들을 만들고 어울렸지만 조심스러웠다.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조용한 타입이었다. 어쩌면 그들도 그들의 색깔을 감추고 지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개성을 드러내라고 했다. 색깔을 드러내라고 한다. 응? 그 색깔이 뭔데. 어떤 식으로 보여줘야 하는 건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술을 먹으면 그게 드러날지 모르니 그냥 해보라고 한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게워내도 꿈속의 꿈속의 꿈에 있는 금고는 열리지 않았다.
직장에 가니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뭘 할 거야. 목표가 뭐야. 돈은 얼마나 받고 싶어. 내 안에 있는 모범답안을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니 입사를 시켜준다. 그렇게 열심히 밤새워 일하고 나니 상사가 한 마디 한다.
너는 너무 색깔이 없어
색깔? 그게 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 상사는 그 색깔을 찾으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했다. 주말에도 출근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다 보면 그걸 찾게 된다고. 너에게 그런 의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그 말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너무 화가 났다. 그 색깔을 찾다가 나는 긿을 잃었다. 그 색깔을 찾으려고 수없이 많은 새벽을 보냈지만 색깔은커녕 더 투명해지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색깔을 하나 둘 찾아갔다. 어떤 사람은 빨간색, 어떤 사람은 파란색, 어떤 친구는 녹색이었다. 어디서 찾았냐고 물었더니 너도 곧 찾게 될 거라고, 앞으로 죽 직진해보라고 한다. 그래서 더 달렸다. 회사를 옮겨보고 부서를 옮겨보고 그저 앞으로만 달렸다. 그래도 내 색깔을 찾을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회사도 옮기고, 한참을 지난 다음에야 나는 내 꿈속의 꿈속의 꿈에 있는 금고를 찾았다. 그 금고의 자물쇠를 살며시 돌려 열었다. 어떤 색깔이 내 색깔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투명한 색이었다. 나는 투명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나만의 색깔. 색깔이 없다는 건 곧 모든 색깔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떤 색이든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
최근에도 많이 듣는다. 너의 색깔을 가져. 너의 글은 너무 색깔이 없어. 너만의 색깔을 가져. 너의 목표는 빨간색이니, 파란색이니. 그럴 때마다 어떤 벽과 마주한 느낌이다. 세상은 너무 개개인의 개성과 색깔을 강조한다. 어쩌면 색깔이 없는 게 내 모습일 수도 있는데, 투명한 색으로 파란색도 되었다가 빨간색도 되었다가 하면 되는데. 그러다 마음에 드는 색깔이 있으면 완전히 그쪽으로 가도 되는데. 그러면 더 변화무쌍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나는 투명색을 가졌어
당당히 투명색을 가졌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게 남들보다 덜떨어진 게 아니라고, 꼭 색깔이 있는 것이 좋고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나의 색깔을 궁금해하고 아쉬워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투명색을 가졌다고. 내 꿈속의 꿈속의 꿈에 있던 금고를 열어보니 투명색이었다고. 그래서 나는 모든 색을 가질 수 있다고. 어쩌면 그들에게 난 결국 조금은 덜 성숙하고 덜 떨어진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분명 그들의 색깔은 탁한 색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기의 색깔을 그렇게 만들어버렸으니까. 그 색깔을 지우기는 힘들 것이다.
세상엔 많은 색이 있다. 무수한 사람들은 다양한 색깔을 가졌다. 그중에는 투명한 색깔도 있고, 검은 색깔도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다고 해서 이상한 것은 아니다. 결국 그들도 언젠가는 꿈속의 꿈속의 꿈에 있는 금고를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니까. 그냥 안심하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