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내 유일한 취미는 영화 보기였다.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영화 보기는 내가 유일하게 꾸준히 즐기고 있는 취미 생활이다. 한 영화 평가 애플리케이션에는 내가 지금까지 2,500편을 봤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편에 두 시간 씩만 잡아도 5,000시간, 일생동안 거의 208일 정도는 영화를 본 시간으로 계산된다. 물론 여기엔 중복으로 한 번 이상 본 영화의 시간은 뺐다. 이런 나의 취미생활은 연애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애할 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극장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나: 자기야 오늘 영화 보러 갈까요? 이 영화도 재밌고, 저 영화도 재미있다고 하네요. 우리 아직 영화 본 적이 없잖아요.
아내: ㄴ..네? 영화요? 그거 너무 빠른 것 같은데요..
나: 응? 빨라요? 뭐가 빨라요? 우리 만난 지 벌써 한 달 넘었는데요. 영화는 처음 만난 날도 보기도 하는데요.
아내: 아니.. 그게 아니에요. 극장 가면 ... 아이 부끄러워요~
나: (당황) 뭐가 부끄러워요? 그냥 영화 보는 건데요? 아무것도 안 해요.
아내: 아무것도 안 한다고요? 극장 가면 막 야한거 하고 그런데요?
나: 에이 무슨 야한 걸 극장에서 해요. 스킨십 이야기하는 거예요? 대부분 손잡고 그냥 보는데요.
아내: 제가 극장에 많이 안 가봤는데. 중국에서는 극장 가자고 하는 거는 진하게 스킨십 하자는 거예요.
나: 그래요? 아니... 한국에서는 그냥 영화 보러 가는데요. 물론 가끔 스킨십 찐~하게 하는 사람도 있긴 있어요.
아내: 아 그렇구나.. 저는 야한 거 .. 그런 거 하러 가자는 줄 알았어요. 그럼 우리 영화 보러 가보시죠!
내 취미를 같이 하자는 말에 아내는 스킨십을 하자는 줄 알고 매우 부끄러워했었다. 사실 6년 전인 그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극장은 주로 스킨십하는 장소로 많이 활용되었다. 물론 최근으로 오면서부터 극장 관람이 어떤 놀이의 형태가 되어 극장은 한국과 같이 일반적인 데이트 코스나 가족 나들이 공간이 되었다. 아내는 그 당시에 나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진짜 영화만 보시네요" 하고 다시 한번 안도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내의 취미는 피부관리다. 결혼 전에도 다양한 화장품과 마스크 팩을 썼는데, 주로 밤에 샤워하고 나서 자기 전까지 열심히 제품을 사용하고 리뷰도 썼다. 피부를 정말 중요시했기 때문에 화장품 같은 것에 일가견이 있었다. 내가 그 취미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씩 아내가 피부 관리하는 걸 볼 때마다 그냥 신기하게 쳐다만 봤다. 난 화장품에 대해서는 완전히 원시인 같은 존재였다. 그저 신기술을 쓰는 신여성을 보는 것 마냥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봤다.
나: 그거 하면 피부가 정말 좋아져요?
아내: 그럼요. 이 제품은 피부 화이트닝에 좋고요. 저 제품은 피부를 탱탱하게 만들어줘요.
나: .......(멍한 표정)
아내: 자기도 좀 해보실래요?
나: 아니오. 나는 이 야채든 남자 크림이면 다 돼요. 어후 저걸 언제 다하고 있어요... 대단하세요.
아내: 피부가 중요해요. 투자할만해요~
그런 각자의 취미활동을 결혼 후에도 이어갔다. 사실 극장에 가서 영화 보는 나의 취미는 한국에서 아내와 하기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아내의 언어로 자막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영어권 영화도, 한국어권 영화도 아내가 100%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결혼 후에는 주로 주말에 혼자 극장에 가서 심야영화를 보고 돌아왔다. 아내도 내가 영화 보러 간 동안 피부관리를 하고 먼저 잠을 잤다. 출산 전까지 우리는 각자의 취미를 아주 편하게 즐겼다.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각자의 취미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어느 순간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게 되었다. 정확히 당근이가 나온 후부터 우리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특히 취미 생활을 할만한 시간을 찾지 못했다. 출산 초기에는 더욱더 아기에게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나마 아이가 자주 잠을 잔다는 점이 조금은 나은 점이었다.
아내: 자기도 많이 힘들죠. 나도 피부관리 편하게 하고 싶다.
나: 자기가 더 힘들죠. 나도 영화 한 편씩 보고 싶다. 매주 한 편씩 보던 게 습관이 되어서 못 보니까 아쉽네요.
아내: 음.. 그러면 자기가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당근이 재우고 나서 나가서 보고 오세요. 어차피 바로 앞에 극장이니까.
나: 응? 그래도 되나? 나만 하기 좀 미안한데....
아내: 어차피 그때는 당근이가 막 잠든 때라서 금방 깨지는 않아요. 자기가 다녀와요. 일주일에 한 번인데요.
나: 아.. 그래요. 그럼 주말에는 자기가 최대한 쉴 수 있게 육아를 좀 더 열심히 할게요.
아내: 그렇게 하시죠!
아내의 배려로 매주 한 편씩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내도 아내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피부관리를 내가 육아하는 동안 했다. 조금씩이나마 그렇게 각자의 취미생활을 하게 되니, 조금은 숨통이 틔었다. 육아 초기부터 지금까지 각자의 취미생활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각자의 공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내는 중국의 웹에, 나는 한국의 웹에, 그렇게 시작한 우리 각자의 취미생활은 모두 저녁 8시 반 이후에 이루어진다. 당근이가 잠자는 시간이 8시 반. 아직까지는 잘 지켜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취미생활에 매일 시간을 쏟는 만큼 잠자는 시간은 늘 부족하다. 당근이가 태어나고 2년 넘게 우리는 7시 넘어까지 자보지를 못했다. 그래도 중간에 안 깨고 잘 수 있는 게 어딘가.
힘든 육아 초기에도 부부 서로에게 각자의 시간이 조금이나마 필요하다. 하지만 이 시간을 만들어내기가 정말 힘들다. 체력적으로도 많이 소진된 상태고, 잠도 부족하기 때문에 부부가 많이 다투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서로가 서로의 공간을 조금씩 열어주고 각자 하고 싶은 무언가를 인정해준다면 서로가 숨 쉴 수 있는 좋은 산소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요즘 아내는 취미가 또 하나 늘었다.
아내: 자기야 나 영화 다운 받아서 아이패드에 자막이랑 넣어줘요. 이제 영화 자주 볼래요.
나: 갑자기 왜요? 통 영화 안 보던 사람이..
아내: 영화 많이 보면 다른 삶을 간접으로 경험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다양한 삶을 영화로 보고 싶어요. 물론 멋진 로맨스도 많이 많이.
나: 하하. 그래요. 그럼 내가 시간 날 때 다운 받아서 넣어 줄게요.
이제 나도 피부관리를 좀 배워야 하는 걸까? 왠지 마스크팩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자꾸만 보인다. 힘든 육아 중에도 이렇게 서로의 취미도 배워간다. 육아하면서도 취미 생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