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걸 좋아했다. 처음엔 단순했다. 버스비가 모자라 먼 길을 걸어서 집에 가고, 지하철 2-3 정거장은 걸어 다니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북아현동 골목골목을 누비며 동네를 많이 걸었다. 지금은 재개발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 작은 골목들이 여전히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 그 길을 걸으며 내 생각들도 많이 자란 것 같다.
사춘기, 공부가 중요했던 시절. 아니 공부보다 몰래 노는 게 더 좋았던 그때, 걸으면서 음악을 듣는 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학생이었던 그 시절은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어폰을 꼽고 동네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저 한 없이 걸어 절이 보이면 절에 들어가 부처님에게 인사하고, 산이 보이면 산으로 올라가 동네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수많은 고민들이 스쳐 지나갔던 그 순간은 그저 걸었던 잠깐잠깐의 풍경만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던 걸음.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복잡하게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조금은 잊을 수 있었다.
좀 더 자신을 믿고 사랑해봐요. 그게 필요한 것 같네
어느 날 한참을 걷다가 들어간 절에서 만난 한 스님은 마음이 복잡하다는 나의 이야기에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해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그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나를 사랑해야 하지. 나는 이렇게 못났는데, 공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얼굴도 못생겼고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앞으로 내가 살아갈 자신이 없는데, 그저 이렇게 걷을 때만 그런 못난 생각이 안 드는데, 어떻게 나 자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지.
그 후로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싫어했다. 남들 앞에 서는 게 무서웠고, 거울 속에 내 얼굴을 보면서 나 자신을 욕했다. 못난 인간. 진짜 못생겼네. 잘하는 거 하나도 없는 놈. 그저 자기 비하만 가득한 인간이 되었다. 군대에 가서도 대부분의 선임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
복학 후 자취 생활을 하며 조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서도 자기 비하의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왜 나를 그렇게 싫어했을까. 왜 나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했을까. 직장 생활하면서 엄한 상사 밑에 모멸감을 느꼈고, 내가 잘하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점점 깊은 늪으로 빠졌다.
최근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우울한 사람도 많다. 그만큼 주변에서 따뜻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 돈에 많은 것이 좌우되며, 투자하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은 많지 않다. 그래서 점점 주변 사람들의 험한 행동이나 말을 접하고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이건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심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노력한 것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는 사회 시스템은 아니다. 많은 것이 운과 환경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결국 우울함이 생기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상담을 권유하거나 걷기나 뛰기 같은 운동을 권유한다. 실제로 이것이 효과가 있다. 과거에 내가 동네를 누비며 온종일 걸었던 것처럼, 그렇게 몸을 움직이면서 내 감정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 감정의 늪에 빠질 때 걸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일하고 밥 먹고 야근을 했다. 야근을 하고 새벽에 퇴근할 때, 차가운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면 상쾌한 기분이 든다. 드디어 퇴근한다는 해방감, 자유로운 기분 때문에, 사무실을 나와 얼마 정도는 걸어가서 택시를 탔다.
언제까지 걷기만 할 거야. 너 하고 싶은 걸 찾아봐. 찾아서 그거에 몰입해 봐.
한참 걷기만 할 때, 한 친구는 내게 다양한 걸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30대에 들어서서야 이것저것 해보기 시작했다. 농구, 야구, 게임, 영화보기, 토론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야근이 많았던 시기에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 우울한 생각이 많이 없어졌다. 사람과 만나고 운동하고 대화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여전히 자기 비하하는 습성은 계속 가지고 있다. 거울을 보며, 내 사진을 보며 내가 참 못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우울해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걷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글도 쓴다. 그것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덧 그런 생각이 많이 들지 않는다. 여전히 내가 하는 모든 것에 자신이 없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어도 모자란 글이고, 내가 하는 업무도 엉망인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는 내가 한 그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면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다시 산책을 나간다. 마음속의 부정적인 생각과 자기 비하의 말들이 맴돌아도 뭔가에 몰입하고 그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들을 볼 때, 많은 부정적 생각들이 없어진다. 그래서 계속 뭔가를 해야 한다. 걷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하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주는 긍정의 기운으로 부정적인 기운을 덮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부정적인 생각을 쫒으며 보낸다. 이 마음속의 전투는 아마도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 같다. 결국 그 전투를 하는 가운데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아주 작은 시간이라도 나를 믿고 격려하고 사랑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제서야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를 이해한다. 나를 사랑함으로써 자기비하와의 전투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 뭔가에 몰입하며 오늘도 나는 전투를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