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일 년에 한 번씩은 미역국을 먹는다.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들에게 생일 케이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미역국이다. 산모들이 출산한 직후 챙겨 먹었다는 미역국은 이미 주변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마트에 가면 미역국 재료가 다 들어있는 간편식을 통해 먹을 수 있고, 미역국과 같은 맛을 내는 스프가 들어있는 라면을 사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그만큼 미역국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고 영양가도 높은 음식이다.
그런 인기 있는 미역국은 내게 달갑지 않은 음식이었다. 특히나 20대 시절까지 정말 먹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식탁 위에 놓인 미역국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생일 때나 한 그릇 정도 먹을 뿐 그 이외의 시간에 미역국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고 만나고 싶지 않은 음식 중 하나였다. 그래서 생일에 미역국을 챙겨 먹으라는 그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중학교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크게 다투었던 날, 큰 소리가 내 귀를 울리고 아버지가 겨우겨우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 머릿속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늘 그렇듯 나도 당장 학교에 가야 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어서 바닥에 붙어버린 내 발을 간신히 움직여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의 얼굴과 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치 없게 꼬르륵 거리는 배를 잡고 학교로 향했다. 배는 고팠지만 도저히 뭔가를 먹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어머니는 이불을 깔고 온종일 방에 누워 계셨다. 다행히 밥솥에는 밥이 한가득이었고, 큰 솥에는 미역국이 가득했다. 일주일은 넉넉히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와 동생이 학교에 간 사이 어머니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밥과 국을 한꺼번에 해 놓으시고는 다시 누워버리셨다. 그렇게 기분이 나쁜, 어쩌면 슬퍼했을 그 순간에도 마음 한 켠에는 우리들이 굶지 않을지 내심 걱정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누워서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그때 왜 하필 미역국을 끓여두셨을까.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가족 중에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김치만 있으면 술술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영양가 높고 오래 먹을 수 있는 미역국을 선택하셨을 것이다. 집안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눈치를 보며 밥과 국을 퍼 식탁 위에 놓고 나면 다른 반찬없이 그저 덩그러니 밥과 미역국뿐이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고 나면 두둑해진 배가 우울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반찬도 없이 거의 일주일 동안 미역국을 먹고 나니, 더 이상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역국을 담은 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안에 들어있던 소고기들은 진작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무엇보다 미역국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참고 먹었는데도 집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그 뒤로도 수일 동안 미역국을 더 먹어야 했다.
그 이후 미역국은 기피 음식이 되었다. 그때 생각이 나 좀처럼 미역국을 먹을 수가 없었다. 미역국이 어떤 맛의 음식인지 거의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생일 때 끓여주시는 미역국은 싫다며 먹지 않았고,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 그리고는 억지로라도 먹으라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기고 했다. 그 정도로 내게 미역국이라는 음식은 과거의 고통을 담은 음식으로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미역국을 먹게 된 건 20대 후반 연애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여자 친구가 직접 끓여준 미역국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콩깍지의 힘이었는지 그렇게 싫어하던 미역국을 입안에 털어넣자 맛있는 식감이 느껴졌다. 한 그릇을 먹고, 또 한 그릇을 더 먹었다. 그 날 이후 미역국은 다시 내게 맛있는 음식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미역국을 다시 먹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미 환갑의 나이가 되셨다. 매년 가족들의 생일에 직접 미역국을 끓이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나이가 느껴진다. 40대에 유방암 투병을 했던 어머니는 본인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셨지만 그 깊은 동굴 속을 빠져나와 여전히 삶을 누리신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밥을 챙겨 주신다. 단, 그렇게 요리하는 뒷모습은 왠지 점점 힘이 없고 지쳐 보인다.
언젠가는 미역국을 내 손으로 직접 끓여 드리고 싶었다. 몇십 년의 세월 동안 남을 위해 끓여 먹이셨던 그 미역국을 살면서 한 번은 내 손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생신 즈음에 몰래 재료를 사다 놓고 모두 잠든 늦은 밤에 부엌에서 미역국을 만들었다. 불린 미역을 간장에 버무리고, 소고기, 마늘, 참기름과 함께 프라이팬에 볶는다. 그리고는 물과 양념을 추가하여 펄펄 끓인다. 내가 만들면서도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어려운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손이 많이 갔다. 특히나 생일 미역은 자르지 않고 끓이는 거라며 긴 미역 줄기를 그대로 볶으셨던 어머니의 방법대로 하다 보니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순간 지난 몇 년간 어머니가 끓여주신 미역국을 먹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년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드셨을 어머니의 뒷모습이 눈 앞을 가득 채웠다.
완성된 미역국을 가스레인지에 둔 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새벽에 선잠이 들었다 일어났다. 방을 살며시 나가니 어머니가 웃으면서 이게 뭔지 물으셨다. 내가 끓인 미역국이라고, 맛이 없어도 조금만 드시라고, 한 그릇 떠서 식탁에 놓아드렸다. 늘 우리에게 끓여서 앞에 놓아주셨던 그 미역국을 이제 반대로 내가 끓여 어머니 앞에 놓았다. 그 맛이 훌륭하지는 않았더라도, 미역국의 색깔이 훌륭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날 어머니가 미역국을 드시며 지으셨던 미소는 훌륭했다. 아마도 내가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드린 미소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을 것이다.
그 이후 결혼을 하게 되면서 어머니께 끓여드렸던 미역국을 다시 요리해드릴 기회를 아직은 만나지 못했다. 대신 새롭게 가족이 된 아내를 위해 미역국을 준비한다. 아내는 중국 사람이다. 한국 음식을 크게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역국은 좋아한다. 생일 때 아내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면 아내 역시 미소를 지으며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아내뿐만 아니다. 장모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장모님께 미역국을 끓여드렸다. 그때가 마침 장모님의 생신이었다. 내가 미역국 재료를 사서 요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시던 장모님은 그 맛을 보시고 나서는 칭찬을 많이 하셨다. 정말 맛있다고, 영양도 많은 것 같다고, 이런 한국요리를 알려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나에게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신다.
그 뒤로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신 장모님은 가끔 생각날 때, 미역국을 끓여 드신다. 내가 아내와 장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도, 미역국을 준비해 주시기도 한다. 그럼 우리는 빙긋 미소 지으며 미역국을 먹는다.
나에게 짜증만 주던 미역국은 이제 우리 가족에게 미소를 주는 음식이 되었다. 한국 음식 중 많은 사람들이 자주 먹게 되고, 영양가도 높은 미역국은 나를 통해서 중국에 있는 아내의 가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들 역시 미역국을 먹고 미소를 짓는다. 이제 세 살이 지난 우리 딸의 생일이 돌아오면 또다시 직접 만든 미역국을 딸에게 차려 줄 것이다. 그렇게 준비한 미역국을 먹는 딸의 미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모습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어본다. 그렇게 미역국은 온 가족들의 미소로 내게 기억된다.
내가 만든 미역국이 만든 미소는 한국 가족들에게 전달되고, 한국을 넘어 저 멀리 중국의 가족들에게도 전달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미소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려 한다. 이 미소가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 되었으면 좋겠다. 맛있는 미역국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