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거절을 받아들이는 방법
누군가를 좋아할 땐, 그 사람만 보인다. 일단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그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몰래 바라보고, 또 머리 속에 그 사람을 떠올리며 내가 가진 나만의 사랑을 키워간다. 그게 꼭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그 시간 자체가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런 짝사랑의 시간이 지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게 되면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는 아예 그런 기회조차 만들지 못하는 짝사랑을 하고, 조금 더 좋은 기회를 만나는 사람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마음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한다. 그 짝사랑의 달콤함은 마치 따뜻한 봄처럼 오랜 시간동안 남아있다.
과거 짝사랑을 했던 시간이 있었다. 고백하는 기회를 만들기보다는 그냥 마음 속에 담아두고 조용히 좋아했던 쪽이었다. 답답하고 때론 슬펐지만 고백한 이후, 거절을 받고 상대방을 볼 수 없다는 두려움이 조금은 더 컸던 것 같다. 이러저러한 짝사랑을 몇 번 하고 고백을 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조금은 불친절한 거절이었다. 그 이후 그 상대방과는 불편한 상대가 되어 조금씩 멀어졌다. 짝사랑은 꽤나 따뜻한 기억이지만 내게 남겨진 뒷맛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그 시간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흘러보냈다. 고유진의 '걸음이 느린 아이' 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아픈 마음을 스스로 토닥였다. 천천히 걸을 걸 그랬다는 노래 가사가 꽤나 공감과 위로를 선사했다.
[�♂️고유진- 걸음이 느린 아이 가사]
함께 걸으면 손닿지 못할만큼
한참을 뒤에 오던 그녀였죠
빨리오라며 그녀를 다그치고
답답한마음에 난 앞서서 걸었는데
천천히 걸을걸 그랬죠
먼저간 날 잃었었는지
그녀가 오질않네요
하루를 헤매다 돌아온 그녀는
어제보다 많이 다른 모습이죠
날 보며 웃는미소도
그 향기도 모두 예전과 같은데
낮설은 그대 모습
�고유진 "걸음이 느린 아이"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VghSUtNfNOw
디즈니+의 시리즈 <사운드 트랙#1>은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오랜 친구 사이인 선우(박형식)과 은수(한소희)의 이야기인데, 선우는 꽤 오래 전부터 은수를 좋아하고 있다. 총 4부작의 이야기에 3부는 선우가 하는 짝사랑을 보여준다.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고백한 이후 다시 보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선우를 보며 꽤 동질감을 느꼈다. 어찌보면 소심하고 바보같아 보이지만, 선우는 꽤나 심각하게 아파하고 고민한다. 얼마나 그 마음을 잘 숨겼는지 은수는 전혀 선우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선우의 마음을 알고 있다.
무척 아름다운 시리즈다. 음악이 딱 귀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극중 은수가 작사가인만큼 여러가지 노래들이 극중에 흘러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리즈에서 꽤 인상깊었던 장면은 두 주인공의 고백과 그 결과는 아니었다. 어찌보면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시리즈에는 은수를 좋아하는 음악 PD가 나온다. 은수와 같이 음악 작업을 하던 그는 일하면서 은수에게 좋은 마음을 품는다. 그러니까 그 남자도 은수를 짝사랑하는 셈이다. 그 남자는 그 업계에서 꽤나 유명한 인물이다. 그래서 자신감이 넘치고, 은수를 향한 자신의 마음도 빠르게 드러내려고 한다. 그 음악 PD가 은수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은수와 만난 그는 은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아주 담담하게 고백한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자신의 위치나 하는 일에 대해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수도 있다. 그 고백을 듣는 은수의 표정에는 당황함이 역력하다. 그렇게 가만히 듣고난 은수는 완곡하게 천천히 거절의 의사를 전한다. 거절을 들은 PD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내 그 거절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여느 드라마나 영화 같았으면, 잘나가는 PD가 화내고 짜증내면서 자리를 뜨는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사운드트랙#1> 속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그저 그 거절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마음을 배려하면서 장면이 끝난다.
넷플릭스에 업데이트 되어 있는 중국 시리즈 <이지파 생활>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 선뤄신(친란)이 직장 상사에게 고백받는 장면이 있다. 선뤄신은 이성적인 커리어우먼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취향은 전통적인 음식에 가깝다. 반면 직장 상사는 고급스런 요리를 좋아한다. 아주 멋진 레스토랑에서 고급 요리를 주문하면서 일하면서 매력을 느꼈던 선뤄신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아주 전통적인 왕자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남자가 여주인공에게 사랑고백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선뤄신은 그 고백을 정중히 거절한다. 그 거절의 말을 듣고난 직장 상사의 반응은 <사운트트랙#1>의 음악 PD의 반응과 비슷하다. 그저 거절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관계를 깨지 않는다.
어쩌면 이건 이런 시리즈 안에서만 가능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거절'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걸까. 그저 담담히 그 '거절'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벽에 막히면 엄청난 상실감과 안타까움이 든다. 그래서인지 가장 먼저 도달하는 감정은 바로 분노와 좌절이다. 특히나 자신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잘나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방에게 함부로 불편한 감정을 내뱉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시리즈 안에 거절을 받아들이는 인물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정말 저렇게 거절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거절을 속으로 삼키고 앞에 있는 상대방과 공적으로 다시 만나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 그것이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담담히 '거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꼭 사랑의 거절이아니더라도 감정을 조금 추스리며 그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이 왠지 좀 더 편안해보인다. 담담한 거절. 왠지 따뜻하다.
늘 거절받던 사람이 내미는 손
많은 멕시코인들이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간다. 꼭 멕시코인들뿐만아니라 수많은 국가의 사람들이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국경을 넘는다. 여러 국가에서 발생한 난민들은 자신들을 받아줄 수 있는 국가에 가기 위해 떠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많은 거절을 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당장 그들은 생존을 위해 손을 내밀 수 밖에 없다. 세상은 꽤 따뜻한 것 같지만 생각보다 차갑고 냉정하다. 좀 더 나은 미래를 보고 걸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생활 환경이 나은 잘 사는 국가들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왠지 자신과 상관 없고 왠지 불편함이 드는 타국의 사람들의 일에 큰 관심이 없다. 그건 무언의 거절이 된다.
얼마전에 넷플릭스에 업데이트된 영화 <더 퍼지: 포에버>(극장 개봉은 2020년)는 범죄를 용인하는 퍼지의 날에 대한 영화다. 이미 여러차례 시리즈가 이어져오고 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멕시코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멕시코에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온 아델라와 후안 부부가 중심이 되는데, 그들이 국경을 넘는데 성공한 이후 1년 후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특히 남편 후안은 백인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말을 잘 다루고 일을 잘해서 능력을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농장 주인의 아들인 딜런은 그를 탐탁치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실 딜런 이라는 인물은 인종차별 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그저 멕시코인이 자신의 농장에서 일을하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그는 계속 무언의 거절을 후안에게 던진다. 그 거절의 힘은 꽤 강력해서 후안은 딜런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아마도 꽤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멕시코인을 비롯한 다른 인종들에 불편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속 딜런은 너무 심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시선으로 후안을 바라본다.
사실 딜런의 이런 시선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는데,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 한국도 여러 국가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야한다. 다양한 국가 사람들이 건너와 일상생활을 해나간다. 난민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입국허가를 요청할 때도 있다. 최근들어 이런 사람들에 대해 꽤 많은 사람들이 무언의 거절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민자 또는 난민들에 대한 기사의 댓글들을 보면 '외노자' 라고 불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불만과 배척을 담은 것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세계에서 이렇게 거절의 모습이 늘어나는건 당연할 것이다. 멕시코인들도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거절을 받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밀입국을 시도한다. 그렇게 어렵게 미국으로 건너가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영화 속에서 행해지는 퍼지에는 과격한 집단들이 거리로 나와 사람들을 마구 죽인다. 특히나 이민자들을 만나면 벌레를 죽이듯 처참하게 죽여버린다. 그렇게 퍼지의 날에 돌아다니는 건, 아주 과격한 '거절'들이다. 그 '거절'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고, 어쩌면 다시 복수로 되돌려 줘야할 행동이다. 그들은 백인 가정인 딜런의 집에도 쳐들어가 가족들을 위협하지만 그 백인 가족을 돕는 건 후안과 그의 아내, 그리고 다른 멕시코인들이다.
이 영화는 약자들이 자신도 도울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영화같이 느껴진다. 수많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인들은 미국인을 거절하지 않는다. 수많은 거절을 그동안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아남아 멕시코로 가려는 미국인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챙긴다. 그런 과정에서 후안과 딜런도 서로를 신뢰하게 된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과 상황은 사실 판타지에 가깝다. 하지만 인종이 다르더라도, 국적이 다르더라도, 성별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거절하는 것이 아닌, 서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저 킬링타임용 액션 영화인 <더 퍼지: 포에버>는 이전 시리즈와는 다르게 받아들임과 용서를 보여준다. 게다가 미국 사회가 그동안 해왔던 일과 현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서 조금은 통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면서 불편하지 않았던건 미국인인 딜런의 가족과 멕시코인인 후안의 가족이 서로 도우면서 위기를 탈출하는 모습 자체다. 그러니까 과거 <퍼지> 시리즈와는 다르게 어떤 '희망'을 보여주면서 막을 내리는 영화다.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