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리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능성
'만약 내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아마 대부분 비슷할 거다. 예전에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예전에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다면.. 예전에 다른 회사를 갔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그런 수많은 선택의 길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서 지금의 내가 된 거다. 머릿속에는 다른 길로 갔을 때의 내 모습을 상상하게 되지만 실제로 나는 지금의 모습으로 현재에 존재한다.
오래전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는 한 사람의 선택의 길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각각의 선택을 했을 때 그 결과도 당연히 달라진다. 어떤 모습이 진짜 행복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의 결말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 갈림길 끝에 선 모습이 크게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난 이미 과거로 돌아갔다 온 건 아닐까. 과거로 갈 때 지금까지의 기억을 잃을 채로 돌아가 과거에 했던 선택들을 그대로 하면서 현재의 내가 된 거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망각의 타임머신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지금까지 나는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어떤 선택을 바꾼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는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수많은 실패들이 지금을 만들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꽤나 멋진 말이다. 수많은 성공들이 날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경험한 수많은 실패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공부에 실패해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고, 여러 번 낙제를 받았다. 그리고 여러 번 연애에도 실패했다. 취직을 해서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수많은 밤을 잠을 못 자고 보고서를 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들어야 했다. 그 많은 실패들은 회사를 옮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결국 지금 결혼한 내 모습을 만들어냈다.
내가 상상했던 수많은 모습들이 어쩌면 다중우주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 에블린(양자경)은 다중우주 속 다양한 자신을 목격하고 경험한다. 에블린은 여러 버전 가운데서도 가장 삶이 고달파 보이든 인물이다. 남편은 이혼을 바라고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다. 게다가 딸은 자신이 반대하는 연인을 데려와 인사시키려 한다. 그러니까 에블린은 삶에 대해 회의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에블린은 자주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영화에는 그 모습이 다중우주와 접속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도 가끔 그런 망상에 빠질 때가 있다. 여러 다른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거다. 현실에서 심각한 이야기가 앞에서 펼쳐질 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 속 내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다르다. 그런 여러 버전의 나를 보고 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힘들어 어려워 보이는 내가 있다. 어떤 때는 절망스럽고 나의 삶이 회의적으로 느껴진다.
영화에서 누군가가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뭔가 마음속이 꿈틀거렸다. 나도 수많은 실패 끝에 여기까지 온 건가. 그 실패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걸까. 그 수많은 가능성들 가운데서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 바로 지금 모습일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꽤나 멋진 영화다. 기발한 이야기 전개로 다중우주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나, 가족, 수많은 가능성, 삶에 대한 고민까지. 이 영화를 보고 할 수 있는 생각들이 꽤나 많다. 그 수많은 생각들이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미래의 내 모습도 생각해 본다. 그 다양한 나의 가능성들을 말이다. 영화 한 편이 이렇게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를 믿을 수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해서 늘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다. 내 외모, 내 학습 능력, 내 직업적인 능력.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부정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좋은 모습을 본다. 나를 보고 학습능력이 좋다고 하거나, 일을 잘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지가 좋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나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늘 두꺼운 안경을 쓰고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나 자신에게는 나쁜 말들과 판단을 해버리고 만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내가 하는 일과 생각들이 과연 맞는지, 잘하고 있는 건지 계속 의심하게 되고 그 늪은 점점 깊어진다. 내가 실제로 경험한 일들을 주변에 이야기할 때도 별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고 경험했던 일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재미있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나의 이야기를 주변에 잘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나를 말없는 친구나 동료로 만들었다. 정말 편하고 친한 친구에게만 나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거의 말없이 조용하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리즈 [글리치]의 주인공 지효(전여빈)는 자신이 외계인을 본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한다.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에게만 그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나마 그 친구와 멀어지면서 말할 사람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저 혼자서만 그 일을 삭힐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은 늘 뾰로통하고 부정적으로 보인다. 남자친구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친절하지 않다. 늘 무표정하고 무심하게 대할 뿐이다.
외계인을 보는 자기 자신이 싫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사이비 종교의 사람들도 만나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과거의 단짝 친구와 만나게 되면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한껏 드러내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서서히 자신이 가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런 자신의 말을 믿어주고 들어주는 그 한 명의 친구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지효가 경험한 모든 일들이 지금까지는 실패였다. 그래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의 얼굴과 지효의 표정이 겹쳐 보인다. 지효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에블린도 마찬가지였다. 에블린은 다중우주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극복했지만 지효는 외계인의 존재에 다가가려 하면서 그것을 극복한다.
흥미진진한 이 시리즈에서 지효의 얼굴이 변해가는 것이 좋다. 아무도 지킬 수 없고, 자신조차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던 지효가 친구를 지키고 남자친구를 찾기 위해 달리고 애쓰는 장면은 자신이 그동안 보지 않았던 가능성을 보고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 자신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가능성. 모든 실패의 선택과 경험들을 뒤로하고 지효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능성을 보고 달려간다.
내가 선택한 길
우리는 매일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에 대한 생각도 떠올리지만 미래의 모습도 떠올린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며 현재 아직 벌어지지 않은 무수한 가능성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그 이미지 안에는 긍정적인 모습도 있고, 부정적인 모습도 있다. 그런 단편적인 미래에 대한 이미지들은 계속 머릿속에 수시로 떠오르며 미래로 걸어가는 길에 영향을 준다. 그렇게 무수한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이미지들은 무의식에 묻히고 때론 꿈의 형태로 형상화된다,
그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된 미래의 모습은 조금씩 현실이 되어 간다. 실제로 자신이 꿈꾸던 미래의 모습과는 다를 수도 있고 또 같은 방향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있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 속에서 미래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고 해도 그것이 현재 실현이 되기까지는 그저 상상 속의 미래일 뿐이다. 사실 상상 속의 미래가 실현되기 전까지는 미래로 한 발짝 나아가기까지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한다. 미래의 모습이 현재가 되었을 때, 안도감을 느끼지만 한 편으로는 다시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도 여러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생각들이 만들어낸 길이다. 영화 <듄>의 폴(티모시 샬라메)은 그런 가능성들을 여러 가지 이미지로 본다. 그건 미래를 본다고 할 수도 있지만 똑같이 실현되지 않은 장면들도 있다. 일반 사람들보다 좀 더 다양한 가능성이 그의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게 조금 더 구체화될 뿐 우리가 생각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계속되는 미래의 이미지들을 본다는 건 어떤 걸까. 폴은 그 미래들을 보고 혼란스럽지 않을까? 나도 종종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 의지 안에 있다. 내 상상 속의 내 모습들은 때론 멋지고 때론 한없이 망가진다. 그 중간에 현재의 내 모습이 있다. 길을 지나가니다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서 생각한다. 지금 여기 있는 내가 아닌 모습. 비행기를 조종하고, 어디선가 멋진 강연을 하고, 내 옆의 가족과 멀리 여행을 간다. 반대로 아주 작은 집에서 초라하게 살면서 외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도 떠오른다. 가장 좋은 점은 바로 현실로 돌아와서 나 자신을 자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듄>의 폴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미래의 이미지들을 보지만 결국 자신이 주도하는 결말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인생의 미래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늘 떠올리는 다양한 자신의 모습들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선택할 수 있다. 폴처럼 거대한 담론 아래 결정해야 하는 무언가는 없지만 나에게도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모습이 있다. 그 모습 주변에는 실패한 모습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들도 있지만 크고 작은 실패 끝에 결국 내가 원하는 어딘가에 서있을 것이다.
그 길은 내가 선택한다. 영화 속 에블린도, 지효도, 폴도 결국 자신이 주도적으로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우리 모두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 길에 수많은 실패가 있더라도, 지금까지 나를 만들었던 실패들을 생각하며, 지금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나만의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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