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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
애플 TV 시리즈 <파친코>는 여러모로 이야기할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누군가는 어머니, 할머니로서의 선자(윤여정)의 관점으로 드라마를 따라갈 것이고, 누군가는 젊은 선자(김민하)의 관점으로 드라마를 따라갈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손자인 솔로몬(진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볼 것 같다. 중심인물들의 이야기가 선자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데 마치 서로의 이야기가 교류하는 것처럼 힘 있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과거와 현재가 짧은 순간에도 교차로 보이면서 각각에 담긴 정서와 감정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원작 소설의 작가인 '이민진' 작가의 강연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질의응답을 받는 질문인데, 한국계로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어느 학생이 한국인으로서 질문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어려움과 두려움을 어떤 식으로 극복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작가는 처음에는 어렵고 당황스럽겠지만 자연스러울 것이고 곧 지나갈 것이라는 식으로 답변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서 학생의 어머니가 자신을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 물음에 작가는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에서 진심과 공감을 느꼈다. 이민이라는 선택을 하고 타국에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언어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가 이어지고 그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일도 쉽지 않다. 당연히 부모의 희생과 노력이 이어지고, 커가는 아이도 그 도움을 받아 타국의 생활에서 최대한 적응하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독립해 나간다. 어쩌면 이민자라면 모두가 공감할 내용이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해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단지 나라만 다를 뿐 부모 세대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려움의 종류와 정도가 조금 다를 뿐 부모의 '마음' 자체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거 부모세대, 특히나 어머니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로 남편과 가족 뒷바라지에 바빴다. 물론 아버지들도 온종일 밖에서 힘들게 돈을 버느라 많은 힘이 들었겠지만 그런 이유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챙기는 건 어머니들의 몫이 상대적으로 컸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이 사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줄이고 자식들을 위해 썼다. 지금도 그런 부모들이 많이 있겠지만 과거 우리 부모세대는 더욱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 강연에서 하버드 학생이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 나의 마음도 움직였다.
어머니에 대한 그늘은 늘 있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면서 여전히 어머니라는 존재가 불편한 측면이 있다. 그건 오래 같이 살다 보면 알게 되는 서로에 대한 불편함과 약간의 거리감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서로를 걱정하고 좀 더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고 느낀다.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조금은 어려웠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살림에 보태셨다. 집안 일과 일을 병행하며 여러 가지 일을 하셨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이후 대학교에 가고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게 된 거 같다. 어머니는 내가 군대 제대하던 즈음 암투병으로 한동안 병원에 계셨다. 그땐 내가 집안일과 음식을 만들었고, 어머니의 병시중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부모님,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더 말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제는 그 '마음'을 안다. 아마 나의 어머니도 나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지 않을까.
나의 어머니가 겪은 어려움은 사실 다른 이민자들에 비하면 매우 적을 것이다. 강연의 하버드 학생은 20대 초반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동안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에 감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차별받고 어려움을 겪었을 그의 어머니에게 충분히 감사하기 위한 방법은 사실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강연 속 이민진 작가의 답변처럼 그런 '마음'으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어머니에게는 감사의 표현이 될 것이다.
시리즈 <파친코>에서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윤여정 배우가 맡은 나이 든 선자다. 오랜만에 집에 온 손자를 위해 바쁘게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푹 고운 곰탕을 끓이는 그의 모습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그가 아주 오랜만에 한국의 쌀로 지은 밥을 먹고 바로 이맛이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것을 감추고 살아왔는지도 볼 수 있었다. 아주 강인하게 마음먹고 일본에 건너가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어진 시간들을 결국 살아낸 선자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그가 어떤 어려움들을 겪었는지는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 남은 회차에서 좀 더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겪은 일들이 만들어낸 그 '마음'이 어떨지 궁금하다.
'부담' 주지 않기 위한 노력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 속 말임(김영옥)은 8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구에서 혼자 산다. 아들 종욱(김영민)이 계속 연락하고 챙기면서 필요한 것이 있는지를 묻지만 말임은 아들의 전화를 계속 빨리 끊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아들이 챙겨주는 것을 계속 밀어내면서 받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보면서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저렇게까지 밀어내야 할까. 영화 속 말임과 종욱은 수차례 말다툼을 벌이고 심지어는 며느리와도 다툼이 이어지게 된다. 그런 모습만 보면 말임은 조금 얄밉게 보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말임이라는 인물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말임은 대구로 내려온다는 아들 종욱의 전화를 용건만 말하고 끊는다. 종욱은 계속 전화를 하면서 자신의 말을 하려 하지만 내려오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며 끊어버린다. 그래도 내려온다는 종욱의 말에 말임은 몸을 일으켜 대청소를 시작한다. 그 모습에서 왠지 따뜻함을 느꼈다. 자신의 집에 내려온 아들에게 시종일관 퉁명스럽게 말하는 그는 결국 아들과 또다시 언성을 높인다. 그리고는 서울에서 같이 살자는 아들의 제안을 다시 한번 거절한다.
말임은 왜 그렇게 아들의 챙김을 거절할까. 영화 말미 그가 누군가의 물음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걔네들한테 부담주기 싫어". 그 말을 듣고 모든 것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그가 매몰차게 아들과 며느리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였고, 또 다른 측면에서 그렇게 아들이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말임에게는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그 '부담'으로부터 피하기 위한 말임의 주장이 계속된다. 하지만 영화 속 어떤 인물도 그걸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 걸 자식들이 완전히 깨닫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부모님 집에 살던 내가 결혼 후에 완전한 독립을 했다. 그렇게 완전히 독립된 가정을 가짐으로써 처음에 느낀 건 해방감이었다. 아마도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그런 해방감이 있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부모님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가서 고칠 기계들이 있는지 필요한 것이 있는지를 확인했었다. 그럴때마나 부모님은 신경 쓰지 말고 알아서 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고 보면 부모님들도 자식들로부터의 '독립'된 생활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었다고, 몸이 조금 불편하다고 못할 건 없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말하지 않을까.
영화 속 말임의 모습에서 '독립'이 보였다. 그가 기필코 밀어내던 자식이 느끼던 '부담' 그리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담'은 결국 말임에게 자신만의 따뜻함을 찾게 한다. 비록 그의 몸은 불편해 보이고 주변 환경도 좋지 않지만 자신만의 보금자리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한다. 그가 누군가와 밥을 먹으며 편하게 TV를 보는 모습에서 그의 모습은 무척 편안해 보인다.
말임은 끊임없이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조금은 얄미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아주 깊은 내면에 담긴 마음은 자식 내외를 위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85세의 나이에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다. 그 주체성에 대한 열망이 영화 속 말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따뜻함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말임은 우연히 따뜻함을 얻는다. 그건 아주 우연히 온 기회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건 말임 스스로가 선택해서 얻어낸 따뜻함이다.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말임씨가 있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계속 챙기는 걸 밀어내던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부담'과 '독립'이 있다. 그들 역시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마치 부모님이 어린 나를 걱정하고 잔소리를 했던 것처럼 이제는 반대로 나이 든 부모님을 내가 보면서 잔소리를 하게 되지만, 조금은 그 '부담'을 내려놓고 알아서 선택하시도록 마음을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연히 찾아온 '따뜻함'을 스스로 선택해서 찾을 수 있도록.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에서 그런 말임씨의 속마음이 보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빛나는 마음
영화 <미나리>는 미국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우리가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중반부터 등장하는 순자(윤여정)는 자신의 딸을 위해 고국을 떠나 먼 미국 땅으로 온다. 영어조차 배우지 않고 고국의 말을 이용해 가족들과 소통하는 그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생각하기보다 딸의 편안함을 생각하며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가 가지고 온 짐보따리에는 그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먼 길을 오면서도 한국에서 난 여러 음식과 물건들을 구겨 넣고 들고 와 딸과 손주들에게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는 따뜻함이 넘쳐흐른다.
순자의 모습을 보고 떠 올린 건 나의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가 이민자는 아니었지만 부산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적응해 나갔다는 측면에서는 조금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대체적으로 따뜻했다. 항상 우리 집에 올 때면 무언가를 싸들고 오셨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다. 나와 동생을 위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그건 자신의 딸,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딸이 조금 덜 고생했으면 하는 마음은 식구들이 먹을만한 요리 재료와 손주들이 먹을 간식거리들을 챙기게 만들었을 것이다.
작은 집에 외할머니가 오시면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졌다. 영화 속 순자를 대표하는 것이 미나리라면, 외할머니를 대표하는 것은 외할머니가 만든 모든 음식들이었다. 직접 만들어 손주를 먹이고, 자신의 딸과 사위도 챙긴 외할머니는 정작 본인은 음식을 많이 드시지 않았다. "어서 더 무~라" 라며 밥 한 공기를 더 가져오셔서 내 앞에 놓으시던 그 모습이 여전히 따뜻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낯선 서울이라는 지역에서 적응하느라 본인도 어려웠을 텐데 외할머니는 크게 힘든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순자에 비해서는 덜 어려웠을 것 같다. 그나마 언어는 통하고 새로운 지역이라는 것만 빼면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을 테니 말이다. 순자도 손주들이 있다. 데이비드와 앤은 처음엔 어색해하지만 곧 할머니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특히 어린 데이비드는 할머니를 따라 미나리도 따는 것도 보고, 냇가에서 물장난도 친다. 그런, 조금은 어색하게 쌓여간 시간은 두 사람 사이에 '친숙'을 만들어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친숙함은 각자가 가진 마음을 빛나게 만든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빛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외할머니가 내게 보여준 그 '빛나는 마음'을 여전히 기억에 담아두고 있다. 그건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때론 지쳐 보였지만 우리에게만큼은 따뜻함을 보여주었던 그 마음. 그건 우리 어머니에게도 이어지는데 그것 어머니가 지금 손주들을 만났을 때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머니가 손주들과 있을 때, 딱 외할머니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이사오거나 새로운 환경이 아닐 뿐,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해줬던 그대로를 나와 손주들에게 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순자가 가진, 나의 외할머니가 가진, 나의 어머니가 가진 그 '빛나는 마음'이 매우 강력하다. 그 마음은 세상의 모든 '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힘이 세다. 여자라고, 이제 나이 든 할머니라고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난 그 '빛나는 마음'이 가진 힘을 봤고,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어머니도 손주들에게 또 다른 '빛나는 마음'을 전해줄 것이다. 그리고 손주들에게 그 마음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그 강력한 마음의 힘이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을 믿는다. 영화 속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였던 순자의 마음은 미국의 수많은 이민자들이 이어받은 마음이고, 그들이 힘을 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렇게 그 마음을 담은 영화도 만들어졌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 마음은 빛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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