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희망'을 찾아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새로운 빙하기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차를 타고 전 세계를 계속 돌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안에 나뉜 계급과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중심인물이 되는 꼬리칸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꼬리칸의 사람들과 함께 계속 앞칸으로 나아간다. 그가 사람들에게 주는 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영화 안에서 인류는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의 계급을 나누고 심화시켜 각자가 가지는 희망이 서로 다르게 만들어진다. 그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 낸 구조다.
드라마로 리메이크된 시리즈 <설국열차> 도 비슷한 길을 간다. 여기선 레이턴(다비드 디그스)이 꼬리칸의 중심인물이다. 영화판의 커티스와 같은 역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레이턴과 커티스 모두 다른 사람들이 의지하게 되는 인물이다. 맨 앞에 선 그의 모습을 보고 '희망'을 보게 되는데, 막상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레이턴과 커티스는 그 사실에 부담스러워한다. 꼬리칸에서 앞으로 치고 나가는 추진력을 발휘하는 순간, 그들의 리더십은 빛을 발한다. 아무 생각 없이 잘 짜인 계획과 임기응변으로 순식간에 열차 내 주도권을 얻는다. 그런데 그 이후에 레이턴과 커티스는 그다음으로 가는 길에서 두려움을 만난다.
영화 속 커티스는 '진짜 현실'을 만난다. 그 자신에게도 필요한 희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은 그,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드라마의 레이턴은 열차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 그다음 자신만의 정치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는 길을 잃는다. 전체 시리즈를 봤을 때 그 역시 자신이 그리고 있는 '희망'을 놓쳐버린다. 두 인물 모두 답답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고 그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그려나가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희망을 가지지만, 리더라고 볼 수 있는 그 두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쉽게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한다.
영화의 남궁민수(송강호) 같은 캐릭터가 시리즈에는 없다. 남궁민수는 앞으로, 위로만 나아가려는 커티스에게 제3의 길을 보여준다. 바로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열차의 밖이다. 영화의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 커티스는 남궁민수가 이야기했던 밖에 자신이 쫓던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리즈에서는 레이턴이 그런 제3의 길을 가려고 한다. 그게 도전해 볼만한 다른 길이라고 생각한 가운데 자신만의 환상을 보고 그 결심을 굳힌다. 완전히 갇혀서 엉켜버린 열차의 사회 시스템 속에는 더 이상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 풀리지 않는 실타래는 그 시스템의 밖을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버전이든, 시리즈버전이든. 이야기가 지향하는 건 분명하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은 '희망'을 쫓는다. 아직 어둡기만 한 좁은 열차 안에서 그들을 살아서 움직이게 만드는 건, 아주 작은 희망이다. 그 힘은 꽤 크다. 그것으로 조직을 만들고 또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는다. 커티스가 그랬고, 레이턴이 그랬다. 곧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이 모든 시스템의 문제를 찾으면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고. 다르게 보면 하나의 사회 시스템을 깨고 다른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전환 속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이 들어있다. 분노와 적개심, 절망감, 질투심 등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인 사람들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다.
현실 세계에서 어떤 나라는 공산주의를 택하고, 어떤 나라는 민주주의를 택한 것처럼 각자의 시스템으로 구성해 간다. 이야기 속 커티스와 레이턴은 열차 안에서 성공한 최초의 혁명가다. 그들이 앞으로 돌진해 가다 결국 옆을 돌아보는 이야기는 같다. 영화도 시리즈도 지금의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고, 곧 소멸해 버릴 것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들의 절망감과 그럼에도 버텨가며 택한 모든 것은 결국 '희망'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 자신도 결국 현재의 시스템 안에서 제3의 길을 보여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차에 비해 현재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길다. 만약 이 사회가 열차라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점점 열차는 길어지고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있다. 여기에 커티스와 레이턴 같은 사람이 과연 힘을 써서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의 정치를 보며, 우리의 사회를 보며, 수많은 대립을 보며, 사실은 꽤 많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설국열차>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방법의 정의가 희망을 줄까
사회는 참 복잡하다고 느껴진다. 특히나 '정의'가 무엇인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 수가 없다. 오죽했으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까지 나왔을까. 세상의 온갖 정치적인 이슈, 사회적인 이슈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선뜻 누구의 의견을 따르기가 어렵다. 각자의 생각이 있고, 각자의 상황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다. 자신에게는 정의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무척 혼란스럽고 헷갈리지만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정의'는 어딘가에 있다. 그것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 나가 연설을 하고, 정치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설국열차>의 커티스나 윌포드가 서로 대립각을 세웠던 것처럼 우리 사회는 계속 그런 대립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내세운 정의의 방법들은 각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정의일 테지만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건 정의가 아니라 악이다. 마침 넷플릭스에 얼마 전에 업데이트된 영화 <야차>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방식으로 정의를 행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영화 <야차>에는 '정의'의 집행 방식에 대한 충돌이 담겨있다. 비밀공작팀의 리더인 강인(설경구)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정의를 얻어야 한다고 보는 인물이다. 반면, 특별 감찰 검사 지훈(박해수)은 정의를 행하려면 그 방법과 절차도 정의로워야 하는 인물이다. 두 인물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크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 액션을 제외하면 영화의 긴장감은 이 두 인물의 대립이 만들어낸다. 관객입장에서 이 둘의 의견을 따라가다 보면 강인이 행하는 정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는 더 큰 정의를 위해 살인을 하고 시설물을 파괴하면서 결과를 얻는다. 그가 운영하는 팀원 모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유는 있다. 하지만 영화가 내세우는 이유는 생각보다 약하다. 마치 갱스터 조직의 모습처럼 행동하는 팀원들과 리더 강인의 모습은 영화 내내 불편하고 거슬린다.
오히려 검사 지훈의 이야기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악인을 잡기 위해 악인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그의 방식은 사실 밀어붙이기에 약한 면이 있다. 영화는 그것을 이야기 초반, 그가 대기업 총수를 수사하고 취조하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잡아야 할 악인을 놓아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정이 정의로워야 한다고 믿는다. 아마도 영화가 지훈의 서사를 공들여 보여주는 건, 그런 지훈의 생각이 설득력이 있다고 믿어서가 아닐까. 영화 내내 강인과 팀원들은 지훈을 무시한다. 그가 계속 설득하는 정의의 방법에 대해 그들은 반대한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무시되는 지훈을 보며 영화 속에 마음 줄 캐릭터가 없어져 버렸다.
영화의 후반부 지훈이 택하는 방식과 행동은 실망스럽다. 강인의 방식을 일부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과정이 정의롭지 못한 정의에 희망이 있을까. 강인은 자신의 팀을 이끌고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해 낸다. 그게 그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살인까지 행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었을까. 영화를 보고 여러 번 생각해 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 강인 같은 인물은 쉽게 만나기 어렵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결과를 위해 과정을 옳지 않은 방식으로 시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일상적인 상황에서 강인 같은 인물이 존재한다면 그는 모든 조직에서 쉽게 버티지 못할 것이다.
강인과 지훈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과 당한 과정에서 파생된 분노를 가지고 있다. 그 분노는 정의를 행하게 에너지를 주지만, 강인의 방식은 악인에 가깝다. 오히려 지훈이 영화 초반 보여준 보습이 내가 생각하는 정의에 가까웠다. 힘든 상대를 만나서 싸워야 할 때도 오히려 더 올바른 방법을 꺼내 들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속 북한 수학자 학성(최민식)은 "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야"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제가 잘 풀어지지 않을 때 가장 필요한 건 인내와 평상심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어려우면 화를 내고 당황할 것이 아니라 다음날 다시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이걸 '정의'를 얻는 것에도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인과 같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문제를 당장 풀려고 부당한 방법을 쓰기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침착히 다음 날 다시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훈이 행하던 '과정이 올바른 정의'가 행해질 때, 비로소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야차>의 액션 장면들은 그런대로 볼만했지만, 결국 강인의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꽤 불편해지는 지점이 많다. 영화는 강인이 정의를 행하는 방식에 이유가 있다며 여러 가지 과거 상황을 던지며 관객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많은 관객이 설득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검사 지훈의 정의가 버려진 카드가 되었다는 것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두 사람의 정의의 방법 자체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순 없었을까. 분노와 복수심이 정의를 행하게 했다는 점에서 무척 씁쓸한 감정이 담긴 뒷맛을 남긴 영화였다. 결국 영화가 이야기한 '정의'에 희망은 없었다.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다
우울증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질병으로도 불리고 있는 우울증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자신의 존재를 하찮게 느끼게 한다. 계속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그러다 정말 마음 깊은 곳까지 그 우울이 파고들면 그땐 그것을 멈출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바로 죽음이다.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그것을 멈추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자살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 그들의 상황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들이 절망 속에서 혼자 괴로워했다는 건 분명하다.
가끔씩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여러 가지 상황에 영향을 받는데 괴로운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에게 쉽게 그것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왠지 아무도 그 상황을 이해해 주지 못할 것만 같아서다.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해도 상대방에게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이유도 있다. 그저 혼자 나 자신과 대화하고 그 우울감을 일부러 느낀다. 그리고 가족이 다 잠들었을 밤이 되면 조용히 흐느껴운다. 그렇게 나의 우울한 감정을 쏟아내고 나면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 된다. 그런 우울감이 심해지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더 이상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거란 생각, 곧 모두가 나를 떠날 거라는 생각. 그런 우울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 삶의 의지가 없어진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가 눈물을 쏟는 것과 죽음이라는 생각에 집중된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혼자는 꽤나 괴로운 일이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의 주인공인 현수(김혜수)는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실종된 세진(노정의)을 마지막으로 수사한다. 현수라는 인물은 과거의 아픈 사고로 우울함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실종된 세진 역시 힘든 상황 속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다 사라졌다. 현수가 세진의 행적을 추적해 나가면서 알게 되는 세진의 마지막 모습은 '외로움'이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외딴섬에서 혼자 외로움을 감당하며 삶의 의지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세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현수 역시 삶의 의지가 크게 있지 않은 인물이다. 사고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이제 자신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가 하는 세진에 관한 수사에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고독과 고립의 그림자는 영화 속 두 인물이 마주한 현실이다. 어두운 그림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작은 빛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그림자는 결국 생명이라는 빛을 잡아먹어 버릴 것이다. 세진은 그 작은 빛을 발견했다. 아니 작은 빛이 세진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빛은 형사 현수에게도 번져간다. 그건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을 우울한 그림자 속에서 빼낸 건, 말도 못 하는 약해 보이는 한 사람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우울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여전히 내 안의 우울감은 그대로 자리해 있다. 현재의 괴로운 상황과 관계에 대한 어려움이 그런 그림자를 만든다. 언제까지 이것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평생 마음속에 숨어있다 나왔다를 반복할 것 같다. 아마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안고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나 소통할 길이 많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의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세진이 결국 그 빛을 보고 다음 삶을 찾아낸 것처럼, 어둠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희망이 찾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은 자살률이 높다. 과거에도, 아마 앞으로도 계속 높을 것이다. 어쩌면 그 퍼센트 안에 나라는 존재가 포함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전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자살이라는 아주 극단적인 생각으로 가기 전 '희망'을 찾는 과정일 것 같다. 얼마 전 개인 상담사와 이야기를 할 때, 상담사가 이야기했다. 털어놓고 또 분노하라고. 나의 상황, 다른 사람의 상황, 사회의 상황 등 다양한 상황들에서 느끼는 점들을 좀 더 이야기하고 화나는 건 속으로 삭이지 말고 겉으로 드러내라고.
영화 <내가 죽던 날>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말이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세진이 맞이한 '희망'을 발견한 수현은 그것으로 자신의 '빛'도 발견한다. 그건 삶의 의지를 만들고, 더 어두운 길로 가지 않게 만든다. 그건 우연히 발견해 낸 것이지만, 무언가를 파고들고 했기에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진은 누군가에게 좀 더 다가갔고, 수현은 일을 하며 그 빛을 찾았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여러모로 우울한 기분을 많이 느낄 수 없는 시대인 것 같다. 수많은 어려움과 감정적인 고난 속에서도 무언가를 하며 또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결국 '희망'을 찾는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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