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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얼굴

#13

by 레빗구미






여성 피해자, 왜 스스로 범인을 찾아야 하지?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과거에 벌어졌던 어떤 일을 기억하는 것은 개별 당사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현장의 분위기나 상황을 녹화한 영상이 없다면 여러 사람이 기억하는 공통된 사실을 바탕으로 그 실체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해자의 말은 중요하다. 공포스럽고 피하고 싶은 그 순간을 떠올려 다시 입 밖으로 꺼내놓는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가해자를 처벌하고 잡아내는데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수사관이 발견한 증거나 증인이 뚜렷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면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특히나 여성에게 일어난 성관련 범죄들은 더더욱 피해자를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애플 TV에 업데이트되고 있는 시리즈<[샤이닝 걸스>는 주인공 커비(엘리자베스 모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커비는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다. 시리즈를 처음 보기 시작하면 이게 어떤 이야기인지 종잡기 어렵다. 80년대로 갔다가 순식간에 90년대로 넘어오고 범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동일한 나이대로 보인다. 이야기에서 현재 시점인 커비가 있는 90년대로 넘어오면 커비가 처한 상황이 펼쳐진다. 소심하고 은둔형으로 보이는 그는 신문사에서 근무하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하며 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당했던 사건에 대해 파고들어 살인범을 찾아내려 애쓴다.


결국 다양한 시간대의 살인 사건을 연결하는 증거들을 찾아내고, 자신을 드러내 기사에 활용하는데 동의한다. 커비는 왜 이렇게 까지 이 사건에 매달려야만 했을까. 시리즈를 보며 안타까움이 계속 들었다. 그 이유는 커비의 주변에 커비가 이야기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큰 피해를 입은 이후, 커비의 삶은 바뀌었다. 피해자였지만 경찰은 범인을 찾지 못했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잊혀 갔다. 그리고 주변사람들도 조용해진 커비의 옆에 있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엄마와의 관계도 썩 좋지는 못하다. 무엇보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의 배경이나 주변 인물이 변할 때가 있다.


갑자기 변한 상황을 보며, 큰 사건의 피해자라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권력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을 아프게 했던 가해자는 아주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 상황에서 피해자가 당당하고 자신 있게 다시 예전처럼 삶을 이어나가기는 어렵다. 그리고 자신이 인지하는 주변의 상황과 관계도 갑자기 변한 것처럼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더 위축되고 은둔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피해자, 생존자로서의 삶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가해자는 처벌을 받더라도 심리적, 사회적으로 받는 고통이 피해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받는 고통은 피해자 쪽이 훨씬 심하다. 그것이 성과 관련된 문제이고 여성이라면 더욱더 소외된 느낌과 더 이상 밖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을 거라는 고립된 느낌이 느껴질 것이다.


시리즈 <샤이닝 걸스>에도 다양한 피해자가 나온다. 살인자는 각각의 시간대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 앞에 나타나 말을 건다. 매우 이상하고 특이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말을 걸고, 불편하게 만든다. 처음엔 단순히 호감 있는 남자가 여자와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그 남자는 스토커나 범죄자처럼 느껴진다. 여자들도 그 상대를 보고 두려움과 이상함을 느끼고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듯 대부분은 죽음을 맞이했다. 똑같이 몸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있고, 경찰은 누가 범인인지 추측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무언가를 해내는 건, 조용히 지내던 생존자 커비의 등장이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조금 위축된 듯했던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살해된 사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비슷한 사건을 파헤친다. 그와 관련된 기사를 쓰는 베테랑 기자와 함께 그 사건의 실체를 파는 그의 눈은 이전과 다르게 빛난다. 그 눈에서 용기와 의지를 봤다. 늘 힘없어 보였던 피해자는 그 자신의 힘으로 가해자를 밝혀내고 잡을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 자신을 숨겨왔지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꺼내든다. 커비의 가장 큰 무기, 온전한 자기 자신을 남들 앞에 꺼내는 것이다.


시리즈 <샤이닝 걸스>는 일반적인 살인사건을 다루는 건 아니다. 연쇄 살인범은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 특이한 범인의 행태와 상황, 그리고 온전히 피해자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시리즈는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음에도 꽤 훌륭하다.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이 시리즈는 모든 피해자가 여성이고, 특히나 생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범인의 실체를 파악하려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피해 여성들을 구원하는 서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첫 번째 시즌의 모든 이야기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아마도 끝까지 시리즈를 보면서 커비의 용기를 응원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모든 피해자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피해자의 얼굴


배우 엘리자베스 모스는 영화 <인비저블 맨>에서 피해자 연기를 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시리즈 <샤이닝 걸스>와 비슷한 역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샤이닝 걸스>에서 유일한 연쇄살인의 생존자이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커비라는 캐릭터는 엘리자베스 모스의 이미지와 무척 어울린다. 약간은 소심하고 조금 불안해하는 그의 연기는 여성으로서 그가 당해야 했던 피해가 한 여성의 삶을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를 그의 얼굴로서 드러낸다. <인비저블 맨>에서도 그는 피해자 역을 맡았었다. 여기서는 살인 사건이라기보다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일 것이다.


영화 초반 주인공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는 집을 탈출하듯 떠난다. 그 과정에서 남편의 폭력성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겁에 질린 세실리아의 표정으로 그 상황을 추측하게 할 뿐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전달하는 정보는 처음부터 피해자의 감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엘리자베스 모스의 표정 연기는 그의 감정에 몰입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의 공포에 질린 표정은 그가 분명히 남편으로부터 끔찍한 행위를 당했다는 것으로 바로 연결시킨다. 폭력의 상황을 전달하지 않았지만 피해자의 얼굴만으로 그것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세실리아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그가 사업에 성공한 남자고 돈이 많다는 것 이외에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것이 영화가 처음 전달하는 남평에 대한 정보의 모든 것이다. 그건 오롯이 피해자의 말에 집중하게 하고 신뢰감을 높이기도 하지만 피해자의 말 밖에 없다는 것이 실제 사실에 대한 왜곡을 만들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세실리아는 친구의 집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의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남편일 거라는 본능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건 친구를 비롯해 어떤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한다.


그렇게 세실리아는 친구의 신뢰를 잃어간다. 문제는 그 불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확산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불신으로 시작된 그 상황은 친구, 친구 남편, 그들의 아이에게까지 확산된다. 또한 공권력에서도 세실리아의 말을 믿지 않는다. 어떤 물리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으면 피해자의 말은 그저 미친 소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증거를 찾는 건 피해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정신적으로 공격한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피해자는 일어나서 자신을 변호하고 가해자에게 맞설 용기를 잃어버린다. 세실리아의 얼굴은 영화 중반 이후 다시 절망을 담는다.


주변에서 작게 의심을 받기 시작한 피해자는 결국 스스로 많은 것을 해야 한다. 세실리아가 스스로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남편에 대항한 것처럼, 시리즈<샤이닝 걸스>의 커비가 스스로 연쇄 살인범을 찾아 나선 것처럼. 아직 우리 세상에서 여전히 많은 피해자들이 두려워서 그저 조용히 숨어 지낸다. 커비나 세실리아처럼 대담한 용기를 가지고 그에 대항해 싸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던져야 하는 일이다. 무척 불공평한 일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아마도 그래서 <인비저블 맨>이나 [샤이닝 걸스] 같은 피해자 서사가 계속 만들어지고 꽤 관심일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모스의 다른 작품을 아직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인비저블 맨>이나 <샤이닝 걸스>에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 온전히 피해자의 시선이 가지는 절망감과 무게감을 무척 잘 보여주고 있다. 왠지 모를 무표정한 배우의 얼굴이 피해자가 겪는 상황을 무척 잘 담고 있다. 이야기의 상황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피해자의 서사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건 배우 엘리자베스 모스의 연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연기와 얼굴 자체엔 모든 피해자의 얼굴이 담겨있다.










완다에게 보이는 절망감


마블 시리즈에서 완다는 특이한 영역에 있다. 굉장히 강력한 마법을 쓰지만 적어도 마블 영화와 시리즈 이야기 안에서는 행복했던 시간이 별로 없다. 그가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그는 하나뿐인 오빠와 함께 했지만 그렇게 행복한 모습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집단에 잡혀 실험을 당하는 실험체였을 뿐이다. 그가 어벤저스 멤버들을 만나고 그 갇힌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편안함과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세계를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는 하나뿐이었고 자신을 우선적으로 지켜주었던 오빠 피에트로/퀵실버를 잃게 된다.


완다의 서사는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최근의 영화인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완다는 빌런으로 등장한다. 흑마법의 힘을 습득해 여러 다중 우주를 오가며 자신의 아이들을 다시 찾으려 애쓴다. 아마도 지금까지 마블이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를 다 본 사람이라면 완다가 왜 그렇게 폭주를 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완다의 폭주를 보고 처음 느껴진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결코 행복할 수 없고, 고통 속에서 이어나가야 하는 삶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그가 빌런의 위치에서 다른 차원의 아이들과 함께 하려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년기부터 하이드라에 잡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지냈다. 그리고 조금 더 정의로운 어벤저스를 도왔지만 오빠를 잃었다. 이후 만난 비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연인으로 발전한다. 아마 이 시기가 시리즈 중에서 완다가 가장 행복한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은 타노스의 출연으로 무참하게 깨진다. 비전은 죽음을 맞고 완다는 그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노스 문제를 해결한 이후, 완다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환상 속에서 비전과 결혼생활도 즐기고 아이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마저도 제삼자의 개입으로 더 지속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은 셈이다.


완다는 사실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맨이 그랬듯 살아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의해서 빼앗겨버렸다고 할 수 있다. 완다는 그런 상황 속의 피해자가 된다. 누구도 완다의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았고 그저 그 능력을 두려워하고 관리하려고만 했다. 현재까지 마블의 어떤 히어로들과 요원들도 온전히 완다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현재 계속되고 있는 마블 시리즈 중에서 가장 불행한 상황을 맞은 캐릭터일 것이다.


완다가 스칼렛 위치가 되어 악행을 하는 건 자신이 가장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쟁취하려는 과정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의 설득도 별로 효과가 없다. 모든 것을 뺏긴 자신이 다시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수단 자체가 바로 자신의 두 아들이다. 지금 자신이 속한 세계에는 없지만 또 다른 지구에서는 아이들을 보고 만질 수 있다.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단 하나만을 바라보고 폭주하는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영화의 말미에 그는 비로소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깨닫게 되지만 굉장히 안타까워 보인다.


사실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서사보다는 스칼렛 위치의 서사를 이해하고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영화다. 하지만 마블 시리즈에 나온 완다의 이전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면 그 정서나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마블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어버린 캐릭터가 바로 완다고 이번 영화에서 그는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 만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 완다의 서사에서 영화를 보면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외롭고 처참한지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혼자 남게 돼버린 존재. 어쩌면 혼란스러운 세상의 피해자로서 완다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살아왔다. 그런 불행한 서사가 쌓여 이번 영화에서 폭주되는 캐릭터로 활용되면서 안타깝게 소비된다. 향후 마블 시리즈에서 완다가 어떤 역할을 할지는 모르겠다. 만약 완다가 다시 등장한다면 이제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해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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