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거기 분명히 '행복'이 있었다.
늘 사랑을 기다렸다. 조용하고 자신감 없던 나에게 사랑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조용히 짝사랑을 하면서 그걸 표현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내 마음이 들킬까 봐 복잡한 머릿속의 말들은 깊은 곳에 숨겨두었었다. 상대를 볼 때의 두근거림. 설레는 감정.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온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대학교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그 사람을 성인이 되고 몇 년이 지나서 다시 만났다.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만났는데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감정이 살아났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참 신기한 것 같다. 이제는 마음속에 묻어두고 정리하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한 순간에 불꽃이 만들어지듯 다시 어둠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를 소설로 처음 읽었다. 이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은 늘 상대방을 기다린다. 몇 년을 기다린 후에 남자를 만나고 또 갑자기 사라진 남자를 또 오랜 시간 기다린다. 그녀가 남자를 다시 만나는 순간은 변함이 없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그에게 달려간다. 그 모습에서 사랑이 보였다. 그렇게 기다리게만 하는 여자를 보는 남자는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그는 바로 몇 분 전에 그녀와 함께 있었지만 상대방에겐 많은 시간이 흐른 뒤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해야만 하는 남자는 늘 죄책감이 가득하다. 그래도 그렇게 시간을 이동한 후에 그는 늘 그녀를 찾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곧 그의 집이고 안식처다. 영화로 만들어진 그 이야기는 소설에서 생각하던 그 이미지 그대로 담겨있었다.
영화 속 그 두 사람이 만나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만나는 것이지만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이별의 순간은 늘 예상하지 못하게 벌어진다. 남겨진 여자는 그 허망함을 느껴야 하고, 남자는 다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기다리고 또 찾는다. 비록 남자가 가진 능력이 그들의 사랑을 매번 찢어놓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뻗은 팔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말 순수한 사랑이 있다면, 그 두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그 상대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면 어떤 시간에도 그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 내게는 여전히 멋진 일인 것 같다.
인기 드라마였던 <도깨비>에서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남자는 죽지 않는 존재, 여자는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한 눈을 가진 존재. 드라마의 마지막에 여자가 죽고, 그 여자가 환생해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는 남자. 여기선 남자가 기다리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찾아간다. 그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만나는 순간도 마치 바로 어제 만나서 서로 사랑했던 것 같다. 영원한 사랑이 있다면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딱 맞는 모습일 것 같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는 사랑은 모두 완벽해 보인다. 그런데 잘 안다. 그런 완벽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 사랑을 꿈꾸고 나도 그런 사랑을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싶다. 대학 때 만나고 오랜만에 다시 만났던 과거의 연인을 떠올리면 그때 그 순간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마치 그게 사랑이라는 듯. 영화 속 주인공처럼 서로를 보고 웃으며 같이 행복을 느꼈다. 거기엔 분명 '행복'이 있었다. 어제 만난듯한. 어제도 사랑했었던 것처럼. 그렇게 진짜 사랑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 보지는 못했다. 현실에서의 사랑이란 다시 보지 못한 이별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때 그 시간에 '행복'이 있었듯, 지금도 그 '행복'을 만들려 애쓰고 있다. 지금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아내와 그 시간을 늘려가고 있다. 지금의 아내와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꽤 많아졌다. 출장 같은 일로 중국과 한국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생긴다. 서로 떨어지면 내가 상대방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를 그제야 깨닫는다. 마치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서 두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떨어진 시간에 상대방을 기다린다. 그리고 상대방이 돌아오는 날, 공항으로 나가 게이트에서 상대가 나오길 기다린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그리고 게이트에서 아내의 모습이 보이면, 마치 영화 주인공이 된 것처럼 아내를 향해 뛴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상대를 안고 그 기쁨의 순간을 만끽한다. 바로 그때 거기 '행복'이 있었다. 바로 거기.
'붕괴'에서 꺼내어 주는 사랑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래(탕웨이)가 파란 무늬의 벽지 앞에 서있다. 그 파란 무늬는 마치 바다 위의 파도 같아 보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간 후 서래는 밀물이 들어오는 해변가에서 점점 다가오는 일렁이는 파도를 맞이한다. 벽지 앞에 있던 서래의 모습이 마치 파도의 한가운데 서있었던 것처럼, 그는 땅을 파고 그 파도를 온전히 맞을 준비를 한다. 파도를 기다리는 그의 표정엔 한치의 망설임도, 후회도 없다. 그저 땅 속에서 들어오는 파도를 맞으며 자신의 사랑을 지켜낸다. 그것이 '붕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가 느끼는 사랑의 크기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신호가 완전하게 맞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랑은 짝사랑으로 시작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 이후에 같이 출발을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랑이 동시에 시작되어 한 시점에 그 사랑의 결실로 달려가기도 한다. 그건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계획했던 방향으로 가지만은 않게 된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이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순간, 아마도 그 상대방은 자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헤어질 결심> 속 해준(박해일)은 자신도 모르게 끌리면 안 되는 사람인 서래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건 조용히 해준의 마음속을 흔들어놓는다.
해준이 느낀 건 의심에 대한 해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진짜 상대방에 좋아서였을까. 아마 영화 속 그 자신도 그것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의심 때문에 서래의 집 앞에서 잠복을 하며 서래를 관찰하면서도 행동 하나하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평소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염탐한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서래와 마주치다 결국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시간은 에로스적인 시간은 아니지만 마치 처음 호감을 느끼고 썸을 타는 남녀같이 보인다. 그건 꽤나 순수한 사랑이지만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서래는 얼마 전에 남편이 죽은 과부고, 해준은 결혼을 한 유부남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기에는 큰 벽이 가로막고 있다.
사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어느 정도 시간차가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한국어와 중국어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듯 그들은 상대방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들 자신도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쉽게 확정 짓지 못한다. 해준 자신도 모르는 사랑의 마음은 상대방인 서래가 먼저 알아챈다. 그건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해준 자신이 '붕괴' 되었다면서 내뱉은 문장 때문이었다. 해준의 그 말은 서래를 지켜주는 말들이었다. 서래는 그 속에 싹트고 있었던 사랑을 눈치챘다. 그때부터 서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고 봐야 될 것이다. 그렇게 그들 사이의 감정은 서로 교류되기보다는 은연중에 전달되고 그것마저 엇갈린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사람이 서로에 분명히 호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더 가까운 사이로 만들지 못하는 건, 해준의 아내 때문도 아니고, 서래의 남편들 때문도 아니다. 해준의 마음속에 파고든 의심 때문이다. 서래가 '붕괴'되지 않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해준의 무의식에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가 서래에 대해 두 번째 의심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친다. 그 요동은 영화 속 비바람처럼 무척 심하다. 그는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때 그 비바람 앞에 다시 나타난 서래는 해준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사랑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주 깊은 마음속 사랑은 꺼내지 않았다.
서래가 가진 사랑은 '붕괴'되었다고 믿는 해준을 다시 '붕괴'이전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바다의 거센 파도 한가운데 몸을 가둔다. 해준은 범죄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서래의 과거 핸드폰을 '깊은 바다에 버려요'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서래는 '붕괴'된 해준을 구하기 위해 그 '붕괴'를 불러온 자기 자신을 깊은 바다에 담그고 자신의 사랑을 오롯이 증명해 낸다. 해준은 서래의 그 마지막 사랑을 느끼겠지만 다시 보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더 큰 '붕괴'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이 두 사람이 느꼈던 사랑의 시간차는 다가왔다 멀리하고 다시 다가왔다 떠나버리면서 꽤 많은 격차를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그 사랑을 확인했지만, 남은 해준은 그렇게 행복할 것 같지 않다. 반년에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사랑을 보여준 서래는, 파도가 밀려드는 그 마지막 길이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을 위해 감당하는 자신의 '붕괴'
짝사랑은 힘들다. 상대방의 마음을 모르고 내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하기도 무척 조심스럽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엄청 엄격해진다. 나의 이런 모습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거야. 이런 건 보여주지 말아야지. 이런 자기 검열은 이상적이라기보단 본능적이다. 상대방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마음. 상대방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은 공허하게 보이지만 그걸 행하고 느끼는 당사자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느껴진다. 짝사랑이란 그렇게 힘든 것 같다. 그걸 옆에서 보는 제삼자에겐 답답하고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그 당사자는 더 목이 탄다.
짝사랑의 영화라고 하면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바로 <스파이더맨 2>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짝사랑했던 메리 제인(커스틴 던스트)에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던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 피터는 그야말로 소심 덩어리고 상대방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부끄럼쟁이다. 공부에는 소질이 있지만 다른 것에는 크게 잘하는 것이 없다. 그건 내가 피터를 볼 때의 시선인데 영화 속 피터가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과 같다. 그래서 나 자신을 피터의 감정과 상황에 자꾸만 대입하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볼 당시 나도 짝사랑을 했었다는 거다. 그저 친구정도로 지냈던 피터와 메리는 분명히 제삼자가 보기에 서로에게 호감이 았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선뜻 나서지를 못한다. 조금 외향적인 성향인 메리도 자신의 감정을 먼저 이야기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피터가 상처받을까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넘어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피터와 메리도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랑의 시차가 여기도 있었던 거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두 주인공은 의심을 통해 만들어진 감정이었지만 결국 서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붕괴’를 감당한다. <스파이더맨 2>의 피터는 메리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을 정신적으로 ‘붕괴’시킨다. 메리에게 계속 자신이 관심이 있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려 애쓰지만 결정적인 시기에는 그 마음을 숨긴다. 그래서 피터 자신은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고 스파이더맨의 능력조차 쓰기 어려워진다.
늘 누군가와 연애를 해왔던 메리도 그걸 알고 있다. 수없이 피터의 확실한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두드렸지만 목소리만 들릴 뿐 실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같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스파이더맨 2>에서 이 두 사람의 마음은 몇 번이나 온탕과 냉탕을 오간다. 이건 밀당도 아니고 단지 그들이 마음을 확인하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스파이더맨 1>에서 맨 마지막 메리가 먼저 자신의 마음을 피터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2편의 맨 마지막에는 피터가 자신의 마음을 알려준다. 이건 피터가 의도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직접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메리는 그 마음을 이미 스파이더맨의 행동으로 알고 있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헤어질 결심>을 보고 자꾸만 <스파이더맨> 커플이 떠올랐다. 결국 남자에게 먼저 자신의 마음을 보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건 메리 제인이다. 그리고 <헤어진 결심>에서도 결국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고 남자를 지켜내는 건 여주인공 서래다. 영화 속 해준은 자신의 마음을 자기 자신도 미처 이해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중에 상대방을 지키면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 드러내는 순간조차 그저 흘려보내고 만다. 그렇게 표출된 마음은 서래의 마음속에 들어가 큰 파도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메리 제인과 피터 파커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어쩌면 그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 각자는 자신의 마음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감수하면서 생활했을지 모른다. 특히나 히어로 생활을 겸하고 있는 피터의 마음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사랑이란 그렇게 시차가 맞지 않을 때 더더욱 마음이 타들어간다. 그리고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싶을 때 그런 시차는 더 벌어진다. 나 자신의 짝사랑도 그랬던 것 같다. 영화 속 피터 파커가 짝사랑을 하듯이 그저 속으로만 생각하고 소심하게 표현했던 나의 사랑은 별 소득 없이 끝났다. 그때의 나는 '붕괴' 상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속은 많이 타들어갔다. 그건 그냥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고, 그렇게 상대방을 놓는 방법이었다.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사랑의 순간들이 이 영화들을 보며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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