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조금씩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 별일 아니라고 넘겼던 순간들이 어느새 마음에 짙은 구름을 만들어간다. 불길한 느낌, 설명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그 불안이 현실이 되는 날. 그때서야 깨닫는다. 아, 내가 무서워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그 두려움을 너무 늦게 알았다.
어머니가 아팠을 때,
회사 상사가 나에게 고함을 쳤을 때,
여차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모든 순간들은 두려움이 현실로 찾아온 순간들이다.
그렇게 찾아온 두려움은 일상을 망가뜨린다.
일상이 무너졌을 때, 누군가를 원망하고, 또 미워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두려움은 늘 그 질문과 함께 온다.
그리고 질문은,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간다.
나는 그렇게 우울의 늪으로 깊이 빠져든다. 그런 감정을 몇 번이나 견뎌왔다.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무너졌던 날들.
나 자신을 비하하고 미워했던 날들.
두려움은 그렇게 나를 미워하게 만들었다.
<곡성>의 종구는 딸을 지키고 싶은 아버지였다.
종구는 딸을 지키고 싶었고,
나는 내 감정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둘 다를 무너뜨렸다.
그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믿으려 했다. 경찰이자 아빠인 그는 현실과 미신 그리고 이성과 광기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그 질문에 마주한다.
“넌 지금 누구 말을 듣고 있는 거냐?”
그 한마디는 곧 나를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누구를 믿고 살아가고 있었던 걸까?
나 자신 조차 믿지 못했던 나는
그 두려움을 어떤 식으로 견뎌왔던걸까.
영화 <곡성> 은 중심인물인 종구를
두려움의 끝으로 몰고가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종구는 무너진다. 딸을 지켜야 했지만, 딸을 잃을까 두려웠고, 믿었던 것들 모두가 거짓일까 봐 흔들렸다. 그의 얼굴엔 공포, 죄책감, 절망이 뒤엉켜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눈빛에서 어느 날 내 얼굴을 봤다.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엄청난 압박이 내게 쏟아져 올 때. 믿고 있던 관계가 산산조각 났을 때. 누구도 내 편이 아니라고 느껴졌던 날.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의심하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등을 돌렸던 날. 그땐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나오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게 두려움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영화 속 종구처럼
나에게도 딸이 생겼다.
딸에게 생기는 모든 일을 챙기지만,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막을 수는 없다.
딸이 태어나자마자 입원했을 때,
신생아 중환자실(NICU) 안 침대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울기만했던 그때
내가 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건 거의 없었다.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나의 마음 속에 짙은 구름을 드리웠다.
종구처럼 무너지진 않았지만,
마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두려움과 함께 느꼈다.
두려움은 모든 걸 시험에 들게 한다. 믿음도, 사랑도, 나 자신도. 하지만 두려움은 결국 질문으로 남는다. 나는 그때, 제대로 들여다보았던가. 도망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봤던가. 그 질문에 끝까지 남을 수 있다면, 비로소 다시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딸아이는 입원 후 며칠 만에
집으로 나왔다.
그 두려움의 시간을 극복하고
이제 10살이 되었다.
난 이제 아이의 두려움을 만난다.
태권도 학원 사범님이 무섭고,
시험이 무서운 아이.
마치 내가 겪어온 그 짙은 구름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
그 두려움은 결국 아이와 함께 자랄 것이다.
이젠 그 모든 두려움을 겪어낸 내가
아이에게 그 구름을 무사히 지낼 수 있게
알려줄 때인것 같다.
〈곡성〉은 아이의 두려움을 지켜내지 못한채
그렇게 끝난다. 하지만 내 마음속 공포는 아직도 어떤 장면처럼 남아 있다. 다시 마주할 용기를 갖는 일, 그게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종구는 끝내 지키지 못했지만,
나는 그 두려움을 기억하며 끝까지 곁에 남고 싶다.
그 두려움에 속박되지 않도록.
그리고 아이도 그 두려움에서 지켜내고 싶다.
다음 화는 〈비포 선셋〉의 셀린 – 후회 그땐 왜 그 말을 했을까. 아니, 왜 하지 못했을까. 후회라는 감정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