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나를 알아봐주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주변의 친구들이 나를 잘 몰랐고,
회사의 동료들이 나를 잘 몰랐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는데, 계속 오해받는 기분. 정작 중요한 건 말하지 못했고,
자꾸만 엉뚱한 감정이 먼저 튀어나왔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가장 쉽게 상처 입히기도 한다.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자기자신에게 붙여버린 아이처럼.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이 벽처럼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엄마는 딸을 걱정하고 돌보고 싶었지만, 그 모든 말이 크리스틴에게는
“넌 그 정도도 못 하니?”처럼 들렸던. 자신이 부정당한다고 느끼면 사랑도 괴물처럼 변한다.
결국 크리스틴의 짜증은 엄마에게 나가고,
주변 친구들에게 나갔다.
그 마음 속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상대방이 가장 먼저 보는 건 짜증이었다.
짜증은 화를 부르고, 소외감을 불러냈다.
그렇게 크리스틴도 자신이 만든 외로움 속에 갇혀버렸다.
“레이디 버드가 그 아이 본명이야?” “아뇨. 제가 만든 이름이에요. 제 이름이에요.”
그 대사가 참 오래 남았다. 누군가의 딸이 아닌 ‘나’로 살고 싶다는 그 소망. 그러나 결국 다시 전화를 건 그녀는, 엄마의 음성을 들으며 울고 만다. 짜증은 그렇게, 사랑이 있는 자리에서 자란다.
시얼샤 로넌의 얼굴은 참 묘하다. 도도하고 예민한 딸의 얼굴인데, 왠지 미워할 수 없다.
아니 왜 짜증내고 예민한지 이해가 가서 미워할 수 없다. 말투는 날카롭고, 행동은 충동적이지만 그 속엔 사랑받고 싶다는 외침이 또렷이 담겨 있다.
그 속엔 힘들다는 목소리도 같이 담겨있다.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짜증은 외면받을까봐 무서워서 나온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나도 30대를 거쳐 40대가 되었다.
이제 나는 아이의 짜증을 받는 나이가 되었다.
나와 가까웠던 부모님에게 짜증내던 내 모습이
가끔 겹쳐 보일때가 있다.
아이도 나에게 짜증을 낸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할때,
사고 싶은 것을 사지 못할 때,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하게 할때.
아이는 나에게 퉁명스러워진다.
얼굴엔 짜증이 담겨있다.
내가 그랬듯 아이도 그렇게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예민하게 군다.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사실은 그저 알아달라고, 그냥 안아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안 나와서 그냥 툭툭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날들이 앞으로 더 있을 것 같다.
내 마음 속의 짜증을 이제는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으니,
아이의 짜증도 조금은 달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날이 한 두 번은 아니겠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 아빠가 되고 싶다.
짜증은 사실 나쁜 감정이 아니다. 어떻게 표현할 줄 몰랐던 감정이, 그 모습으로 나오는 거니까. 관계가 남아 있으니까, 실망도 있고 화도 있고 짜증도 있다. 그건 어쩌면,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짜증마저도 웃으며 꺼낼 수 있을지 모른다.
다음 화는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찾아오는 감정에 대해서. <곡성> 속 종구처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우리 삶을 마비시키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