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무 일도 없던 시간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놀라울 만큼 평범하고, 특별할 것 하나 없었던 그날들.
중학교 어느 여름 방학.
집에서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소리.
'고물 삽니다. 안쓰는 세탁기, 냉장고, TV 삽니다'
어쩌면 일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음이었을 것 같다.
조용한 집에서 들을 수 있는 일상의 소리들.
대학교를 다니면서 혼자 자취를 하던 시절.
혼자 수업을 듣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배가 너무 고파 주변을 둘러보다
마트에서 라면 2봉지를 샀다.
자취방에 와서 가스렌지를 켜고
물을 올린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에
라면 2봉지를 넣고, 끓는 라면을 본다.
점점 익어가는 라면을 보면서 왠지 설레인다.
너무 맛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침을 꿀꺽 삼킨다.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뭔가 이루고 있진 않았지만, 어딘가 가고 있는 기분이었고 매일매일 작은 설렘이 있었다.
삶을 살면서 마음 속 어딘가에는 늘 불안감이 있었다.
무언가 해야하는데 못했던 순간들.
공부를 엄청 잘하고 싶었고,
취업을 잘하고 싶었고,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그래서 그런 일상의 장면들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았던 그때.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설렘은 결과나 성취가 아니라 그 순간에 집중할 때 나왔던 감정이다. 일상을 살면서, 한 끼 먹을 라면을 끓이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흘러가는 하루에 몸을 맡긴 채 그렇게 나도 알지 못했던 마음 속 작은 설렘을 붙잡고 있었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은 도시에서의 실패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지쳐 있었고,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고, 삶이 가만히 흘러가는 것 같아 불안해했다. 하지만 밭을 일구고, 나물을 무치고, 가스불 위 냄비속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혜원을 연기하는 김태리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을 참 잘도 표현해낸다.
<리틀 포레스트> 속 그녀의 연기는 배우 자신의 일상인 것만 같다.
밭을 매고, 물을 끓이고, 쌈을 싸서 입에 넣는 모습까지,
모든 장면이 연기라기보단 그냥 살아가는것처럼 보인다.
화려한 사건 없이도, 그녀의 눈빛과 손짓만으로도
혜원의 감정이 고요하게 스며든다.
그래서 더 현실 같았고
더 설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녀가 음식을 만들고 나서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이걸 먹으면, 나아질 것 같아.” 그 말 안에 설렘이 있었다. 희망이라고 하기엔 아직 작고, 기쁨이라고 하기엔 조용하지만, 어디선가 새순처럼 올라오는 따뜻한 감정.
우리는 늘 큰 변화만을 기다린다. 대단한 일, 누군가의 인정, 눈에 띄는 성과.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설렜던 기억은 대부분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 비롯되곤 한다. 따뜻한 밥 한 끼, 누군가의 미소, 봄바람이 불던 오후 같은 순간들.
설렘은 거창하지 않다. 그건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 끝에 혼자 조용히 끓인 라면 같은 감정일지도 모른다. 살아있다는 걸 잊지 않게 해주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만드는 그런 감정.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은
그 모든 걸 말없이 보여줬다. 말 대신 요리로, 눈빛 대신 계절로. 그래서 더 설렜다. 그렇게 더 오래 남았다.
그리고 나도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아니 그런 순간들을 지나고 있다.
가까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뛰어노는 아이의 모습.
땀에 흥건히 젖었지만
행복하게 미소짓는 아이의 표정.
내 손을 잡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아이의 말.
내가 요리를 해서 내놓을 때,
맛있겠다며 음식을 집어 입에 넣는
아이의 반응.
그 사소한 순간들이 늘 내 곁을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같이 떠올려지는 그말.
'괜찮을거야.'
겉으로 아무 일도 없었지만 속으로는 한참 무언가를 키우고 있었던 그 시절. 이제 와 그것을 설레는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건 그때의 내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오늘도 설렘은 내 옆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그저 그 장면들을 내 마음 속 깊이 담아 저장해 둘 뿐이다.
언젠가 그 설렘을 꺼내봐야하니까.
다음 화는 조금 다른 감정, ‘짜증’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레이디 버드> 속 크리스틴처럼, 왜 나를 몰라주냐고, 나도 힘들다고 소리치고 싶었던 날들에 대해. 우리는 늘 설렘과 짜증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