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간들을 살면서 슬펐던 날들을 떠올리면, 유독 말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어린 시절엔 그게 뭔지 몰랐고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것이 ‘슬픔’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 감정이 들 땐, 그저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고,
혼자 인게 편했다. 조용히 혼자 있는 그 순간
누군가 다가와서 '괜찮아?'라고 묻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사람들 눈을 피해 방에 박혀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나는 늘 참는 편이었다.
감정적인 파도가 찾아오면,
일단 그 감정을 관망하며 가만히 있는다.
그게 참는 거라고 할수도 있지만,
조금 관망하고 판단을 유보한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어쩌면 우유부단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화를 낸 적도 있고, 억울하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진짜 속마음을 꺼낸 순간은 많이 없었다. 그저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했고, 조금만 참아보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20대 초반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연애도 하고,
일도 하고, 신나게 놀기도 하는데 나는 매일 같은 방, 같은 책상 앞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일만하며
그저 그런 오늘을 살아냈다. 20대의 초반을 지나는 기간 동안
연애를 하지 못했고 수도권에 있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것도
나에겐 생각보다는 마음의 짐이 되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고, 2년쯤 후 이별이 찾아왔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이 찾아왔다. 길을 걷다가도 울고, 술마시다가 울고, 밤이면 이불 속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이별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보다 더 깊은 슬픔은 어머니가 암 투병을 하셨을 때였다.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말없이 누워 계셨고, 나는 당근을 갈아 당근 쥬스를 드리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매일을 버텼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옆에 있는 일이었다.
울지 않았다고 해서 슬프지 않았던 게 아니다. 그땐 슬픔이 너무 커서 도리어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곧 떠날 수도 있는 사람 앞에서
내 눈물 따위는 보이면 안되는 어떤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보다 더 아픈 사람 앞에서는 울 수도 없다는 걸 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영화 〈소원〉 속 아이와 그의 부모를 보며
드러내 놓고 울 수 없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소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고,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슬픔과 아픔이 소원이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쑤시고 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변 어른들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영화로 그들을보고 있는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어떤 것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아, 소원아.”
슬픈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슬픈 말이었다.
그 말은 위로라기보단, 슬픔을 억누르게 만드는 말 같았다.
소원의 아빠는 딸 앞에서 울지 않는다. 아이를 위해 웃으려 하고, 애써 평소처럼 대하려 한다. 하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 그는 홀로 울고 또 울었다. 아이에게 더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슬픔을 감추는 것은
온전히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슬픔보다는 평범한 감정을.
기쁨의 감정을 아이가 느낄 수 있게.
그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아이가 슬픔을 깨고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한 것.
가장 슬플 때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속 이레 배우의 눈빛도 그랬다. 대사 없이, 그저 침묵으로 모든 고통을 표현해낸다. 눈을 가만히 뜨고 앞을 바라보고
아무 감정 없는 듯도 보이는 그 모습.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입술보다 더 슬펐다.
탈속에서 땀에 흠뻑 젖어 딸 옆에 있는 아빠.
그리고 그 옆의 소원.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내 안의 기억이 울렁인다. 나도 누군가 앞에서 그런 눈빛을 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를 바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던 때.
가족이 아플 때, 사랑이 끝났을 때, 나는 '괜찮아'라고 말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슬픔을 말하는 순간 무너질까봐,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을 깨뜨릴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픔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폭발하지 않고, 어디에도 튀지 않는다. 대신 마음 한가운데서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오래 남는다. 잊힌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올라오고, 괜찮다고 생각한 날 다시 울컥해진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모양을 바꿔서 내 안에 남는다.
누군가가 울지 않고도 슬플 수 있다는 걸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리고 어느 날, “네가 웃을 수 없을 때, 나도 웃을 수 없었다”는 어떤 문장을 떠올렸다. 그게 어쩌면 내가 품고 있었던 모든 슬픔의 정체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내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나의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괜찮아 울고 싶으면, 슬픔을 느끼면 울어도 괜찮아.
너의 눈물까지 사랑할게'
그래도 다행인 건, 그런 고요한 슬픔을 지나온 뒤에 가끔은 설레는 마음이 피어난다는 거다. 아주 작고, 아주 조용하게.
다음에는 그런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처럼,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문득 마음이 뛰는 날. 새로운 계절이 다가올 때처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설렘의 마음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