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켄슈타인>(2025)
우리는 대부분, 왜 태어났는지 모른다. 태어난 순간부터 이 세계의 빛과 소리, 냄새를 경험하며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시작한다. 알면 알수록 신비롭던 세상은 단순한 구조로 보이고, 그 안의 나 자신은 점점 초라해진다.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은 자기 장점을 보기보다 단점을 더 크게 느낀다. 그때 문득 묻게 된다. 왜 나는 태어났을까. 왜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어졌을까.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에게 물어도 명확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는 그런 생각 말라고 단호히 말하거나, 기대에 못 미친다며 자식을 몰아붙이기도 한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을 만든 존재에게서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세상에 던져진 채, 스스로의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그 원초적인 질문인 ‘나는 왜 태어났는가’를 빅터(오스카 아이작)와 괴물(제이콥 엘로디)이라는 두 존재의 시선으로 다시 묻는다.
[첫번째 감정] 빅터의 호기심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속 빅터는 천재지만, 동시에 미친 사람이다. 그는 죽음을 거스르고 싶어 했다.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생각은 그에게 과학의 꿈이자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의 뿌리는 고결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세상을 놀라게 하고,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었다. 그 열망 끝에서 그는 생명을 창조한다. 하지만 그 생명은 아름다운 존재이기보다, 그의 욕망이 형체를 가진 괴물이 된다.
괴물이 깨어난 순간, 빅터는 기쁨을 느낀다. 무척이나 흥분해 괴물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려 하지만, 그건 이내 실망감으로 바뀐다. 괴물은 그가 바라던 완벽한 창조물이 아니었다. 괴물은 언어를 배우는 데 더디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며, 인간의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다. 빅터는 시간이 지날수로 그 모습을 참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존재를 무시하고, 차갑게 내친다. 마치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았던 방식 그대로 되풀이하듯. 빅터는 자신이 증오했던 인물이 되어버린다.
그가 괴물을 사냥하고, 끝내 죽이려 하는 이유는 단순히 실패를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복수처럼 보인다. 그는 괴물을 죽이려 하면서, 결국 자신이 만든 죄의 그림자를 지우려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괴물을 창조한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이 더해진것이 아니었을까. 그 모습이 이상하게 슬프게 느껴진다. 욕망의 끝에서 무너진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만든 괴물에게 쫓긴다. 빅터의 집착은 악의가 아니라, 후회와 공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두번째 감정] 괴물의 호기심
괴물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세상에 던져졌다.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는 아버지의 눈빛 대신 공포를 봤다. 세상은 그를 태어나자마자 거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괴물은 세상을 알고 싶었다. 눈에 비친 하늘, 물의 냄새, 인간의 웃음소리, 그 모든 세상이 그를 이끌었다. 그는 성이 불탄 틈에 탈출해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몰래 숨어 인간들을 관찰했고, 그들의 삶을 배워나갔다. 배우려는 마음,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것이 바로 그의 첫 번째 감정이었다.
영화 속 빅터의 동생과 결혼을 하는 엘리자베스(미아 고스)를 바라보는 괴물의 시선은 유난히 따뜻하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인간으로 대해주는 존재에게 그는 본능적으로 마음을 연다. 마치 아이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 같은 감정이다. 이후 눈먼 노인과의 만남은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외모에 영향 받지 않아야 비로소 괴물의 진짜 모습을 바라 볼 수 있다. 노인은 괴물의 진짜모습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괴물은 처음으로 자신이 인정받는 존재임을 느낀다. 그 짧은 대화 속엔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위로가 담겨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 따뜻함을 오래 허락하지 않는다. 괴물의 호기심은 결국 절망으로 변한다. 자신이 아무리 배워도, 아무리 인간을 흉내 내도 세상은 그를 괴물로 본다. 그는 죽고 싶어 하지만 죽을 수도 없다. 생명의 축복이 그에겐 형벌로 작용한다. 죽을 수 없다는 것은, 계속 외로워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 절망을 무섭게도 섬세하게 그린다. 그 장면에서 관객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을 본다.
[세번째 감정] 아버지와 아들의 후회
영화의 마지막, 빅터와 괴물이 다시 만나는 장면은 거의 기도에 가깝다. 오랜 세월 괴물을 쫓아다니며 삶의 끝에 선 빅터는 자신이 만든 존재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한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에 모든 후회가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 아버지가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닫는다. 괴물은 자신을 닮은 존재였음을.
괴물 역시 그 순간 변한다. 그는 죽이고 싶은 대상이었던 창조자를 바라보며 분노 대신 슬픔을 느낀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였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그는 후회한다. 죽고 싶다고 수없이 외쳤지만, 이제는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남는다는 건, 결국 증오를 넘어 용서로 나아가는 일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엔딩에서 괴물은 어둠 속에서 사람을 돕는 모습으로 스쳐 지나간다. 빅터가 끝내 이루지 못한 인간다움을, 괴물이 대신 보여준다. 그렇게 그는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간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그 이유를 아주 잠시 깨닫는다. 인간은 그렇게 괴물처럼,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아름다운 괴물 이야기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다. 이건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에 가깝다.그는 과거 영화에서 늘 그랬듯, 괴물을 괴물로 그리지 않는다. 그 안에서 인간의 외로움, 창조의 오만, 그리고 사랑의 결핍을 이야기한다. 카메라는 어둡고 서늘하지만, 인물들의 표정은 뜨겁다. 죽음과 생명, 부모와 자식, 창조와 책임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던지며, 델 토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신은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메시지를 완벽히 지탱한다. 빅터 역의 오스카 아이작은 광기와 연민 사이를 오가며, 인간의 오만함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늘 실력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인데, 이번 영화에서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괴물 역을 맡은 제이콥 엘로디는 영화 <키싱부스>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배우다. 이 영화에서는 눈빛 하나로 수십 가지 감정을 보여준다.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 전달되는 외로움은 그 어떤 대사보다 강렬하다. 엘리자베스를 맡은 미아 고스는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던 배우인데, 이번 영화에선 가장 따뜻한 인물을 보여줬다.
음악은 비극을 감싸는 담요 같다. 피아노와 현악이 주는 울림은 슬픔을 미화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게 한다. 그리고 촬영은 마치 르네상스 회화처럼 정교하다. 델 토로는 어둠 속에서도 인간의 얼굴을 비춘다. 그 얼굴엔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 남는다.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태어났는지 모르는 존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괴물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살아가고 있나요?' 답은 아마 이 영화 속 어딘가에 있다. 살아있으니까. 그게 전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