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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키친anime cook Jun 12. 2019

백엔의 사랑

지는 인생을 살아도 더 이상 패배자는 아닙니다

영화 리뷰 영상은 보통 2-3일이면 만들 수 있다. 영상 편집보다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일이 오래 걸린다. 내가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한 영화만 가지고도 반나절 이상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생각들을 정리해서 5분 정도의 영상에 넣어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글을 썼다 지웠다 뺐다 넣었다 순서를 바꿨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를 몇십 번 반복하기도 하고 이제 다 됐다 싶어서 녹음을 시작하면 녹음하는 중간중간 바꾸고 싶은 부분이 생겨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특히 내 마음에 쏙 든 영화일수록 이 정도가 심해지는데 <백엔의 사랑> 리뷰 영상도 제작하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았고 이치코가 너무 좋았다. (안도 사쿠라 짱!)

 

<백엔의 사랑>은 자신은 물론 주변에 그 무엇도 돌보지 않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이치코의 이야기이다. 실패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사는 패배자 이치코.


그녀의 가족도 그런 이치코를 한심한 골칫덩이로 여기고 그녀 자신도 자신을 그런 존재로 여긴다.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어린 조카와 게임을 하고 그 조카에게 독설을 내뱉으면서도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 보이는 그녀는 이따금씩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백엔샵으로 향할 뿐이었다. 간식거리와 만화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복싱 체육관 안의 한 남자를 한참 바라보곤 했는데 그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느릿느릿 그곳을 벗어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치코는 자신에게 쌓일 대로 쌓인 동생 후미코와 대판 싸우게 된다. 집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그 일로 인해 이치코는 집에서 나와 독립을 하게 된다. 엄연히 말하면 독립은 아니다. 엄마 지원을 받아 방을 얻었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집에서 나와 혼자 살게 된 그녀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백엔샵 야간 알바에 지원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또 다른 의미의 이치코들을 만나게 된다.


전엔 백엔샵에서 일했었지만 지금은 폐기된 음식들을 훔쳐서 먹고사는 할머니, 우울증이 있는 점장, 영화에서 존재 자체를 도려내고 싶은 수다쟁이 개쓰레기 노마, 그리고 체육관 안의 남자 카노까지 이 영화엔 보통의 인생을 사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현실을 무덤덤한 듯 살아내는 이치코에게도 표정과 눈빛,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어느 한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복싱 체육관 안의 남자 카노와 함께 있을 때였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하며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가 왜 좋은지 영화 속으로 들어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뭐... 사람 좋은 데는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카노와의 첫 번째 데이트를 마친 뒤 어느 날, 카노는 자신의 복싱 은퇴 시합에 그녀를 초대하게 되고 이치코는 난생처음 보는 복싱 시합에서 승자와 패자가 승패와 상관없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모습에 매료되고 만다.

어쩌면 늘 패배자의 삶을 살았던 이치코에게도 이러한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연히 복싱의 매력에 눈을 뜬 이치코는 여러 가지 아픔들을 겪으며 복싱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패배자로 여겨지는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삶을 제대로 살아갈 의지를 찾아가게 된다는 새로울 것 없는 스토리를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치코가 마주한 끔찍한 현실을 무덤덤하게 날것 그대로 보여주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녀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거나 섣부르게 위로하지 못하도록 거리감을 둔다. 그래서 그런지 변하기 전의 이치코의 감정은 읽히지 않는다. 나 같으면 저런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추측만 해볼 뿐 표정이나 소리로 그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극 중 이치코의 역을 맡은 안도 사쿠라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낸다. 긴 머리 사이로 숨겨진 얼굴과 그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초점 없는 눈빛, 구부정한 자세로 느릿느릿 걷는 걸음걸이와 말투까지 그녀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아파도 아프다고 소리 한번 내지 않던 그녀, 아픔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내는 이치코.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인생이 복싱으로 인해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야기가 나는 참 좋다. 이런 서사에 사용되는 ‘누구로 인해’ 변화되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변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아픔들을 날려버리기 위한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단 한 번이라도 이겨보고 싶다는 삶의 의지를 담아 손을 뻗어낸다.


얻어터지더라도 맞서 싸우기를 결정하며,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을 알리고, 싸울 수 있기에 질 수도 있는 거라고, 그래서 지는 인생을 살아도 패배자는 아니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영화 < 백엔의 사랑 >


누워서 영화를 보던 나를 벌떡 일어나게 했던 이 영화를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영화 #리뷰 #백엔의사랑


[무비키친] 지는 인생을 살아도 더 이상 패배자는 아닙니다 / 백엔의 사랑

https://youtu.be/AMKykPkuD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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