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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Sep 18. 2019

시간이 안긴 사랑의 지속성 <만추>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을 받았던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 (2010)는 다채로운 공기보다 단색적인 공기를 고수하며 돈이 안긴 사랑의 한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시간이 안긴 사랑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태용 감독은 아무도 없는 썰렁한 놀이공원의 풍경을 보여줄뿐더러 ‘철거(demolition)’라는 표지판을 클로즈업해 담아냄으로써 돈이 안긴 사랑은 특정한 순간을 갖게 해줄 수 있을지언정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랑의 효용적 가치가 끝내 숫자 ‘0’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반면에, 계속해서 ‘애나(탕웨이)’에게 손목시계를 주려는 ‘훈(현빈)’의 모습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손목시계를 받아들이는 ‘애나’의 모습은 낮은 지점에서 시작된 사랑의 효용성이 시간이 흘러 증폭되고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애나’가 ‘훈’에게 자신의 과거를 전하는 장면과 ‘훈’이 ‘애나’가 보는 앞에서 ‘왕징(김준성)’과 충돌하는 식당 장면에서 진행되는 맥락에 다소 어긋난 담화는 시간과 사랑의 관련성을 견고히 한다. 전자의 경우, ‘애나’가 자기 삶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할 때, 중국어를 잘 모르는 ‘훈’은 ‘하오(좋아요)’와 ‘화이(나쁘다)’만을 활용해 대화를 이끌어 간다. 분명 ‘훈’의 대답은 통상적인 맥락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이상하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는 ‘훈’의 경청하는 자세는 오랜 시간 엉킨 과거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싶지만 지친 ‘애나’의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데 도움을 준다. 표정이 희미하게 밝아진 ‘애나’의 표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후자의 경우, ‘애나’가 식당에서 왜 싸우냐고 울부짖을 때 ‘훈’은 ‘왕징’이 허락 없이 자기 포크를 사용해서 다퉜다고 하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는 표면상 우스울 수밖에 없는 답변이다. 하지만, 이후 갑자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왕징’의 굳은 표정을 클로즈업해 담아낸 장면과 얼굴이 약간 상기된 ‘애나’의 표정을 담아낸 그다음 장면이 이어지면서 ‘훈’의 뜬금없는 말 한마디가 ‘애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주는 안내자 역할을 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김태용 감독은 시간이 안긴 사랑만이 오래 유지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후반부에서 옅지만 짙게 깔린 안개, 그 안개 속에서의 키스, 그리고 2년 후 출소한 ‘애나’가 2년 전 ‘훈’과 갑작스럽게 헤어진 장소에서 기다리며 독백처럼 내뱉은 “오랜만이네요”라는 한마디로 응축해 묘사한다. 무엇보다 ‘애나’가 ‘훈’과 재회하지 못했더라도, 2년 전 어머니의 부고로 허락받았던 3일간의 휴가를 계기로 ‘애나’가 다시는 하루를 그저 버티지 않고 살아 숨 쉬는 감각과 함께 보낸다는 점이 관객에게 시간이 안긴 사랑이 지닌 성질을 전달하는 데 충분했을 테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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