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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Oct 28. 2019

우주에서 다시 써내려 가는 인류 신화, <하이 라이프>

망가진 문명사회와 우주에서 여는 인류의 새로운 신화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이 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를 창조해 에덴동산에 살게 했지만, 뱀의 간교에 넘어간 이브가 터부를 어겨 두 사람은 그곳에서 쫓겨났다. 그 후 모든 인간은 원죄 의식을 안고 태어나게 되었다. 근데, 클레어 드니 감독은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 하에 묵인했던 비윤리성과 비합리성이 누적되면서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고, 인류가 결국 지구 전체가 멸망하는 미래사회를 맞이한다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존속될 수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클레어 드니 감독은 이와 같은 염세적인 가정 하에 지구 멸망 전 인류를 살리기 위한 우주 실험에 죄수들이 보내졌고, 수백 년이 흐른 후 생존한 두 사람이 우주에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 가는 과정을 에덴동산의 이야기 구조를 완전히 뒤집은 영화 <하이 라이프> (2018)로 그려냈다.



영화는 우주선의 고장 난 부품을 자기가 만든 부품으로 교체하다가 장비를 어두운 우주 속으로 떨어뜨리는 ‘몬티(로버트 패틴슨)’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초반부에 나오는 플래시백 장면 중에 어디론가 향하는 기차 이미지가 제공된다. 두 장면은 조형적 유사성과 맥락적인 의미로 중첩되면서 문명과 사회 시스템의 붕괴를 넌지시 알린다. 과거 장면에서 기차는 화면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며 하강 이미지를 만든다. 만약, 기차가 문명의 산물을 가리키고, 하강 이미지는 붕괴나 추락을 의미한다면 이는 무너져 가는 문명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장면에서 부품을 고치는 연장은 이상이 생긴 문명의 이기를 고칠 수 있는 도구를 나타낸다면, 하강 이미지와 결속되어 결함이 있는 문명이 고쳐지지 못한 채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근데, 지구 문명이 쇠망했음을 '몬티'가 '아기 윌로(스칼렛 린지)'에게 개밥을 주고 오겠다며 방을 나서는 장면으로 보다 더 자세하게 보여준다. 개밥을 주기 위해 방을 나선 '몬티'가 도착한 방은 다름이 아니라 개가 한 마리도 없는 사무실이었으며, 그곳에서 하루 일과를 보고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실 개밥을 준다는 것은 컴퓨터에 설치된 프로그램을 통해 지구에 하루 일과를 보고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몬티'가 보고하는 업무를 비유적으로 언급한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비유적 표현에서 '개'는 우주선 안에 있는 죄수들을 가리키는 거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을 포함한 죄수들은 표면적으로 인류에 활용할 블랙홀의 회전에너지를 측정해야 한다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었지만, 실은 가망이 없는 실험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죽지 않는 한 감옥 같은 우주선에서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은 플래시백 장면 중 소녀에 의해 죽은 채 강에 버려진 개의 상황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구를 떠난 지 수백 년이 지났으므로 지구와의 교신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구에서 보낸 영상이 우주선에 주기적으로 흘러나온다. 이는 실험을 주도하는 고위 간부들이 팬옵티콘처럼 죄수들이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들기 위해 우주선에 미리 영상들을 저장해놓고 일정 시간에 배포되도록 설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몬티'는 이 보고 시스템의 허위성을 눈치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지구 문명이 이미 종말을 맞이했음을 자각하고 있다. 고로 '몬티'가 일과 보고를 마무리할 때 내뱉은 욕설은 착잡한 심정을 대변하는 동시에 더는 쓸모없는 문명의 규범을 향한 조소로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하이 라이프>는 성교(性交)를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눠 통제함으로써 미래사회에서 지구문명의 몰락은 필연적인 결과임을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성교는 상대방과의 격정적인 육체적 접촉을 통한 욕구 해소와 출산이라는 재생산의 기능이 공존하는 행위다. 그렇지만, 우주선 안에서는 실험이라는 구실 아래 성교 행위는 욕구 해소는 가능하지만 재생산 기능이 소거된 수음(手淫) 행위와 재생산 기능은 있지만 욕구 해소의 기능이 제거된 성행위로 구분해 통제를 받는다. 실험의 적합성을 따지지 않은 설정은 인간의 본능에 위배되었을뿐더러 인위적으로 억압했다는 측면에서 비윤리적이다. 그러므로 <하이 라이프>는 위와 같은 실험을 바탕으로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 아래 묵과한 인류의 비합리성을 보여줬고, 이런 비윤리성이 수십 세기 쌓이다 보면 문명이 진보하기는커녕 몰락하는 게 당연한 결과이지 않겠냐고 이야기한다.



본능이 통제받는 상황에서 죄수들은 '딥스(줄리엣 비노쉬)'처럼 자위행위를 할 수 있는 방에 들어가 고통스러운 상황을 잊으려고 하거나, '찬드라(라르스 아이딩어)'처럼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반면, '몬티'는 수도승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일하게 금욕을 지키는 순결의 아이콘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사실 '몬티'는 자기 딸인 '윌로'를 근친상간하고 싶은 욕구와 터부를 어기면 안 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 중인 인물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몬티'는 '윌로'에게 소변과 대변의 형태가 달라져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으므로 절대로 먹지 말라고 금기를 이야기한다. 이 금기를 분석하자면, 배설물을 섭취하지 말라는 말은 자기 몸에서 배출된 무언가를 먹지 말라는 뜻이며, 아기 또한 인간의 신체에서 나온 무언가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근친 간 금기로 확장할 수 있다. 따라서, '몬티'가 '윌로'에게 배설물을 먹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한다는 것은 딸을 범하고 싶은 욕구가 끊임없이 발동하고 있지만, 우주로 떠나기 전 지구에서 형성된 원죄 의식 때문에 이를 애써 부정하는 심리를 대변한다. 게다가, 본인의 수염을 깎은 다음 버리지 않고 작은 통에 보관하는 행위 역시 금기를 깨고 싶지만 갈등 중인 내면적 상황을 상징한다.



그런데, 성장한 '윌로(제시 로스)’는 근친상간을 저지르려고 하는 ‘몬티’와 거리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윌로'는 '몬티'를 성적인 욕구를 같이 풀어낼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윌로’는 우주선에서 수없이 진행된 ‘딥스’의 인공수정 실험 끝에 태어난 유일한 아이였기에 또래 남자아이가 없었을뿐더러, 시간이 흐르면서 ‘윌로’에게 ‘몬티’는 아버지이자 우주선 안에 있는 유일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몬티’ 옆에서 자다가 초경을 한 ‘윌로’가 당황하기는커녕 자기 침대로 이동해 그의 시선을 유도하는 장면과 어느 순간부터 금기를 언급하지 않는 ‘몬티’의 태도를 종합적으로 숙고한다면, 결국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쉽게 예상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Monte(몬티)’라는 이름은 ‘산’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monte’ 혹은 이탈리아어 ‘mònte’에서, ‘Willow(윌로)’라는 이름은 ‘버드나무’를 뜻하는 영어 ‘willow’에서 유래되었는데, 산과 버드나무는 자연의 영역에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게 불가하므로 미래에 벌어질 사건이 애초에 예견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몬티'는 우주선 밖에서 작업하다 장비를 영원히 분실해서 지금까지 연료를 많이 소모하는 부품을 떼어내 우주선의 생명을 연장했지만, 우주선이 더는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자 ‘몬티’와 ‘윌로’는 함께 블랙홀에 빠지기로 결정한다. 근데, 그전에 ‘몬티’는 ‘윌로’에게 “Shall we?”라고 물어봤고, ‘윌로’는 이에 대해 단언적인 목소리로 “Yes.”라고 대답한다. 비록 두 사람의 대답만 놓고 보면 애매하지만, <하이 라이프>가 다루는 핵심 금기가 근친상간이라는 점과 '윌로'가 자신이 엄마와 닮았냐는 질문에 특별한 존재라고 대답한 '몬티'의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대답을 참고한다면, 두 사람의 대화 장면 이후에 나올 장면이 혼인식일 거로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또한, 에덴동산에 추방된 후 돌아가지 못한 아담과 이브와 달리, '몬티'와 '윌로'는 손을 잡고 블랙홀로 들어가 폐쇄된 어두운 공간을 연다. 그리고, 열린 공간 사이로 빛이 통과하는데, 이는 두 사람에 의해 우주에서 인류의 새로운 신화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다.



'몬티'와 '윌로'가 창조해낸 새로운 인류 신화는 지구 문명과 다른 규율과 규범으로 채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신화는 문명사회에서 설정한 금기를 깨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명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뒤집었고, 문명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근친상간을 새로운 사회를 여는 매개체로 삼았기 때문에 <하이 라이프>는 특정 집단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집단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를 철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전후 맥락을 따지면서 이 영화를 읽는다면, 금기를 부수고 영화를 매개로 삼아 신화를 써내려 가는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의 담대함과 작가주의적인 면모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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