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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Nov 16. 2019

켄 로치 감독이 던진 세 가지 질문
<미안해요, 리키>


알다시피 켄 로치 감독은 영국 노동계급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를 조명하는 영화를 지금까지 만들고 있는 거장이다. 전작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는 관공서의 복잡한 절차를 포함한 영국 관료제의 문제가 어떻게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는지를 키친 싱크 리얼리즘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리고 제72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은 영화 <미안해요, 리키> (2019) 또한 이와 같은 경향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안해요, 리키>는 전작보다 더 학문적인 관점에서 꿈과 행복을 박탈당하는 영국 노동계급의 현실을 바라본다. 우선, 주인공 ‘리키(크리스 히친)’가 취직한 택배 회사의 ‘책임자(해리엇 고스트)’에게 갈등론적 관점을 부여해 자본주의가 불평등구조를 어떻게 정당화하는지 이야기한다. 그런 다음 ‘운명 비극’의 측면에서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리키’의 삶을 분석함으로써 운명이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본다. 끝으로 교육 사회학적 입장에서 주인공의 아들 ‘셉(리스 스톤)’의 일탈 행동의 원인을 생각해보고 이에 해당하는 교육 평등 이슈를 담론화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을 무너뜨리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가


켄 로치 감독은 초반부터 택배 회사 책임자의 입을 빌려 자본주의가 ‘리키’를 포함한 노동계급을 어떻게 소모하고 버리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다. ‘리키’는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그리고 경험을 쌓은 후 본인 사업장을 갖기 위해 택배 회사에 취직한다. 이때 책임자는 ‘리키’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책임자는 ‘리키’에게 본인이 직접 관리해야 하는 구역이 생겼으니 이제 자영업자가 된 것과 다름없다고 말할뿐더러, 계속 가족적인 가치가 담긴 단어들을 활용하며 앞으로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함께 일할 거라며 ‘리키’를 안심시킨다. 이처럼 책임자가 처음에 ‘리키’ 앞에서 보인 따뜻한 모습은 갈등이론과 연관성이 있다. 갈등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관계의 모순과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불평등의 재생산을 정당화한다는 이론으로, 책임자는 계급구조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중간자 위치에서 ‘리키’에게 공정성과 가족적인 가치를 내세워 기회균등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책임자가 내뱉은 말의 이면에는 지배집단의 이익을 보편적인 이익인 것처럼 호도함으로써 특권층을 비호하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다. 더군다나 책임자는 이 환상을 토대로 근로고용계약서 작성을 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여기고,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노동계급이 기계처럼 비합리적으로 일하다가 폐기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게다가, 책임자는 ‘리키’에게 택배 업무를 위한 비싼 기계를 제공하면서 분실 및 고장 시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오직 가족과 함께 하는 밝은 미래만 생각하는 ‘리키’는 자본주의 계급 관계 간의 모순이 합리화되는 과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서서히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끊임없이 초과근로수당 없이 초과근무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휴가를 갈 수 없는 상황임에도 ‘리키’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투입되는 노동력이 많아질수록 기대하는 미래와 점차 멀어지는 반비례 현상이 일어난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리키’를 포함한 노동계급은 작업수행에 알맞은 인지적 및 사회적 기능을 갖춘 인간 자본으로 재탄생했을 뿐 언젠가 버려질 처지에 놓여 있다. 후반부에 ‘리키’는 괴한의 습격으로 몸을 가누는 게 힘들어졌는데 택배 회사 책임자는 다짜고짜 ‘리키’에게 의료 보험을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할 뿐만 아니라 기계 파손 및 택배물 분실에 대한 모든 책임은 ‘리키’에게 있으니 비용을 부담하라고 통보한다. 심지어 책임자는 철면피한 태도로 당분간 대신 업무를 볼 대체 기사를 찾았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리키’의 아내가 분노를 표출하지만, 책임자는 ‘리키’를 직원이 아닌 자영업자 취급하며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리키’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계급 간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특정 계급의 이익만 증가하는 사회 시스템을 고발할뿐더러 이를 존속시키는 자본주의의 계급 편향성을 지적한다. 



운명이 한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중 한 명인 소포클레스의 대표적인 작품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은 운명 비극에 속하는 희곡 문학으로 희극과 달리 개인에게 집중하고, 그 개인에게 운명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운명 비극에서 주인공에게 드러나는 특징이 세 가지가 있다. 우선, 주인공은 계급뿐만 아니라 성품에서 고귀함이 드러난다. 오이디푸스는 용맹할뿐더러 테베(Thebes)에 심각한 전염병이 돌자 이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 그렇지만, 계급과 성품에서 드러나는 고결함은 끝에 맞이할 몰락 혹은 비극을 더욱더 극적으로 만든다. 두 번째 특징은 과거에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잘못된 행위를 하거나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가 자기 친아버지인 줄 모르고 우발적으로 살해한 사건이 이에 들어맞는다. 세 번째 특징은 주인공이 자만심(hubris)에 차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자만심은 신이 내린 신탁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를 가리킨다. 즉,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구하기 위해 하는 모든 언행은 자만심에 해당하며, 과거에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를 찾아 처벌하라는 공언이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된다.  



이를 토대로 ‘리키’의 삶을 분석하자면, ‘리키’는 오이디푸스처럼 계급과 성품에서 모두 고귀함을 지닌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 가족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에서 그의 성품이 고결하다고 볼 수 있다. ‘리키’는 잠을 많이 못 자면서 과도한 업무량을 처리해야 하지만, 이렇게라도 가족의 행복을 수호할 수 있다면 견뎌낼 수 있다는 인내심과 용기를 보인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인내심이 강화될수록 ‘리키’가 미래에 대면하게 될 비극의 크기는 점점 커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리고 비록 ‘리키’는 오이디푸스에서 드러난 두 번째 특징과 관련이 멀지만, 세 번째 특징인 자만심을 드러내는 인물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리키’는 열심히 일한다면 언젠가 노동계급으로서의 운명을 극복해 경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지금보다 편리한 생활을 안길 수 있다고 굳건히 믿는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혹은 그 시스템에 소속된 특권층의 입장에서 인간 자본에 불과한 ‘리키’의 긍정은 자만심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아래 ‘리키’의 긍정적인 가치관은 의도치 않게 자만심으로 해석되고, 안타깝게도 ‘리키’는 지배계급에 자신의 모든 피와 살을 내놓는 운명에 갇히게 된다.  



학교 교육이 사회의 평등에 기여하고 있는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리키’와 달리 그의 아들 ‘셉’은 일탈 행위를 일삼으며 관객의 분노를 유발한다. 그렇지만, 켄 로치 감독은 관객의 격앙된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셉’의 일탈을 여러 차례 제공한 게 아니다. 켄 로치 감독은 ‘셉’을 통해 사회의 평등에 기여해야 하는 기관인 학교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영국의 교육 현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영국의 교육 이념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개인의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영국이 이와 같은 교육 이념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켄 로치 감독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영국의 교육제도는 과거의 계급 질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트 교육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영국 교육 시스템이 계급과 성별에 상관없이 학생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부여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의미다. 특히, 공부를 잘했던 ‘셉’이 어느 순간부터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사회 규범에 저항하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는 상황은 교육이 계급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평등에 전혀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과 유관하다. 



교육 평등관은 기회의 평등에 해당하는 허용적 평등과 보장적 평등, 그리고 내용의 평등에 해당하는 교육 조건의 평등과 교육 결과의 평등으로 나눌 수 있다. 허용적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받을 기회만 균등하게 허용하면 교육 평등이 실현된다는 견해고, 보장적 평등은 경제적, 지리적, 사회적 제반 문제를 해결해서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취학을 보장한 것을 평등으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교육 조건의 평등은 교육 조건을 평등하게 마련했을 때 평준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교육 결과의 평등은 교육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학업성취 혹은 이로 인한 삶의 기회 및 소득에 있어서 계급 간 격차가 작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극 중에서 학교는 교사를 폭행한 ‘셉’에게 유기정학 처분을 내렸고, 집에서 컴퓨터로 수업을 들으라고 결론을 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학교가 학생에게 유기정학을 내릴 때 교육 자료, 교육 방법, 교육 시설 등 교육 조건의 평등을 실현했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전자기기 사용과 온라인 수업이 교육 여건상의 차이를 줄이는데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현실은 경제적 상황 때문에 연락을 주고받기 위한 휴대폰 이외 전자기기를 갖추기 힘든 가정이 상당수 있으며, ‘리키’의 가족이 그런 가정들을 대표한다. 



또한, 가구에 컴퓨터가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내린 학교 측의 결정은 불우계급이 겪는 각종 사회적 제반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장적 평등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셉’의 언행은 윤리적으로는 옳지 않지만, 교육 결과의 평등이 성취되기 힘든 영국 현실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므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 ‘리키’는 자식들이 본인의 고된 삶을 물려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셉’에게 예전처럼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진학하고 원하는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타이른다. 즉, ‘리키’는 교육을 매개로 소득과 삶의 기회에 있어 계급 간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안타깝게도 ‘셉’은 부모의 입장과 정반대의 견해를 드러낸다. 아마도 ‘셉’은 학교생활에서 깨달은 점과 대학을 졸업했지만 계급 차를 극복하지 못한 주변 지인의 사례를 바탕으로 교육의 보상적 평등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자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날 선 형태로 표출한 게 아닐까 싶다. 



“If young people don’t make a change, we’re all lost”
 - 2019년 11월 1일 ‘Get into Film’와의 인터뷰 중에서


결론적으로 관객은 <미안해요, 리키>에서 노동계급을 위한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만, 켄 로치 감독은 잔혹하더라도 관객이 노동계급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사실주의적 접근과 학문적인 접근을 동시에 활용한다. 따라서 켄 로치 감독은 아파도 가족을 위해 출근하는 ‘리키’의 모습과 그의 출근길을 막으려는 나머지 가족 구성원의 장면에서 관객들이 가족애를 느끼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와 자녀들의 만류를 뿌리쳐야 하는 ‘리키’를 포함한 노동계급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기를 바라고, 이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 사회개혁에 관한 방안을 같이 논의하자고 호소한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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