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보 감독의 영화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2018)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2018)는 후 보 감독이 본인의 소설 『거대한 틈(Huge Crack)』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제68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섹션 국제비평가협회(FIPRESCI)상과 GWFF장편데뷔상(특별언급)을 받은 것을 비롯해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작품이다. 만저우리에 있는 코끼리에 관한 이야기를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전달하며 시작하는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주인공 네 명 ‘위청(Yu Zhang)’, ‘웨이부(Yuchang Peng)’, ‘왕진(Congxi Li)’, 그리고 ‘황링(Uvin Wang)’의 하루를 전한다. 이들의 하루는 잿빛 하늘처럼 참담하다. ‘위청’은 친구의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의 투신자살을 직접 목격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웨이부’는 학교폭력을 당하는 친구 ‘리카이(Zhenghui Ling)’를 도와주다가 가해자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사건에 연루되며 예상하지 못한 하루를 보낸다. 퇴역군인 ‘왕진’은 자신을 쓸모없는 노인으로 취급하며 양로원에 보내려는 딸의 가족 때문에 집을 나섰다가 키우던 개의 죽음을 지켜본다. ‘황링’은 교사와의 원조 교제 사실이 전교생에게도 알려졌을뿐더러 어머니까지 자신을 외면하자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후 보 감독은 처음에 이들의 하루를 단순히 병렬적인 상태로 나열했다가 끝에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이는 본인이 관찰한 중국의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함도 있지만, 궁극적인 의도는 내부인의 시선에서 조망한 중국의 미래를 논하기 위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기본적으로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채도가 없는 무채색 계열의 톤을 고집함으로써 중국의 민낯을 폭로하고자 한다. 이에 덧붙여 극 중에서 대부분 시간을 걸으면서 흘려보내는 인물들을 따라 수평 트래킹 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무채색 계열의 공간에서 수평 트래킹 숏을 진행해 똑같은 계열의 다른 공간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어둠 끝에 빛을 볼 거라는 기대를 완전히 꺾어버린다. 이는 중국 사회가 얼마나 삭막하고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있는지 표현하기 위한 연출 및 촬영 방향성이다. 후 보 감독이 지적하는 현대 중국 사회의 문제는 상류계급은 보다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면서 사회문제가 일어나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행여나 상류계급은 욕망을 강하게 추구하면서 발생한 문젯거리를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바로 회피하거나 책임을 애꿎은 하류계급에 묻는다. 특히, 예전부터 ‘웨이부’가 불을 붙인 성냥을 위로 던지면서 축적시킨 까만 그을음으로 가득한 천장 이미지는 상류계급의 시선을 사회의 병폐 현상에 돌리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이뿐만 아니라 후 보 감독은 중간계급의 삶도 조명한다. 중간계급은 하류계급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더 나은 삶을 사는 건 분명하지만, ‘위청’의 친구 가족처럼 상류계급의 부유한 삶을 따라가고자 하는 야욕이 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욕구를 충족할 기회가 있으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상류계급처럼 더 위로 올라가려는 욕심은 개인을 심신으로 갉아먹고, 아울러 꿈을 이뤘다고 할지언정 이미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서 그 개인에게 남은 건 기쁨이 아닌 공허감일 뿐이다. 이런 상태를 더욱더 차갑게 묘사하려는 시도는 죽음을 포함한 하강 이미지를 수반한다. 예를 들어, ‘위청’의 친구가 투신자살한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위청’이 자기 아내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에 관한 절망감으로 보이지만, ‘위청’이 숨은 방에 들어설 때부터 창문이 있는 베란다와 방 밖에 있는 아내 사이를 번갈아 보는 시선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원인은 고갈된 심신적 에너지와 그로 인한 우울감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근데,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중국 사회의 문제를 계급 간 갈등과 계급 내 속물적인 욕망으로 국한하지 않고 세대 갈등으로 확장한다. 영화 초반부에서 ‘웨이부’의 아버지가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악취를 ‘웨이부’의 탓으로 돌리며 욕한다. 중후반부에는 ‘황링’의 어머니가 말다툼하던 중 물이 새는 화장실을 고치지 않고, 가정부를 왜 고용하지 않았냐고 ‘황링’에게 소리를 지른다. 교사의 경우 학생들을 쓰레기라고 부르며 졸업하면 대다수가 시장에서 꼬치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거나 그냥 굶어 죽을 거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심지어 ‘황링’과 원조 교제를 한 사실이 발각된 교사는 반성하기는커녕 ‘황링’을 포함한 요즘 젊은 세대가 어른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회 암적인 존재라고 치부해버린다. 이는 기성세대의 무책임이자, 인간이 과거와 현재의 상호 지속성이 만들어낸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미성숙함이다. 이런 기성세대의 모습에 좌절한 젊은 세대는 분노를 표출한다. 이를테면,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어른들도 자기를 쓰레기로 취급하자 조소하며 울부짖는 ‘웨이부’의 모습을 담아낸 시점숏이 있다. 혹은 원조 교제를 한 교사의 아내가 ‘황링’의 집에 들이닥쳐 집안 자체를 쓰레기 취급하자 뒤에서 ‘황링’이 휘두른 알루미늄 방망이는 젊은 세대의 분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첨예한 갈등이 해소되지 못하고 계속 곪아 터지는 상황을 지켜보며 후 보 감독은 지금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관계성이라고 진단을 내린다. ‘황링’이 교사와 원조 교제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면, 교사는 시대는 바뀌어도 일상생활은 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은 살아갈수록 좋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극심해지는 고통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건 새로운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므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현명하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교사의 발언은 자기 문제뿐만 아니라 계속 터지는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태도가 만연한 중국 현실을 대변한다. 무엇보다 교사가 ‘황링’에게 들려준 유년 시절 이야기는 잘못된 일을 해결하지 않으려는 상관의 결여를 나타낸다. 교사는 유년 시절 친구가 벽돌로 고양이를 죽이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를 지적하지 않을뿐더러 옳지 않음을 바로잡지 않고 회피하는 현대 중국인의 도덕성 결핍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이뿐만 아니라 초반부에 ‘황링’이 학교폭력을 당하는 ‘리카이’의 문제에 관여하는 ‘웨이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 그리고 교사가 학교 시설물 파손에 대한 배상책임을 지려는 ‘웨이부’에게 어차피 학교가 다른 학교와 통합되면 건물을 철거할 거라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장면도 관계 맺기의 중요성을 망각한 중국의 현재를 보여준다.
보편적으로 많은 영화감독은 자국의 우울한 사회를 그려낸 후 최소한의 희망을 논하려고 한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를 관람한 관객 중 대다수는 후 보 감독도 이런 경향성을 따른다고 생각할 테다. 왜냐하면 후 보 감독이 기성세대와 달리 관여를 통해 도덕성을 형성하는 사회적 약자와 젊은 세대의 상황을 지속해서 내세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웨이부’는 본인이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지 않음에도 친구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자 외면하지 않고 가해자에 맞선다. 심지어 가해자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비해 ‘웨이부’는 친구와 함께 각자 집에서 무기를 준비한다. 혹은 ‘왕진’이 자기 개를 죽였다고 오인한 한 남성이 물리적인 힘을 가하려고 하자 ‘웨이부’는 ‘왕진’의 일에 관여해 상황을 종결하는데 기여한다. 역으로 ‘왕진’은 갑자기 큐대를 담보로 돈을 빌려달라는 ‘웨이부’의 부탁을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결국에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조직 폭력배가 ‘웨이부’가 어디에 있냐고 윽박지를 때도 본인 일처럼 대응한다. 기성세대처럼 상관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던 ‘황링’이 나중에 심경의 변화를 경험한 후 본인도 이유는 모르지만 서글퍼하는 ‘왕진’의 손녀에게 울지 말라고 말을 건네는 후반부 장면도 후 보 감독이 역설한 관여성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나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할 때 죽음의 이미지가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으며, 상관 맺기 및 도덕성 형성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고 간주하기엔 러닝타임상 아직 이르다. 따라서 후 보 감독은 관계성을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인도적 차원의 해결책이 아니라 침울한 현재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웨이부’, ‘황링’, 그리고 ‘왕진’이 마침내 코끼리 울음을 들었기 때문에 후 보 감독이 역설한 관계 및 도덕성의 중요성을 희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게다가, 목적 없이 걷던 세 사람이 만저우리를 가겠다는 공통된 목표 의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버스가 잠깐 정차했을 때 밖에서 ‘웨이부’가 제기를 차자 탑승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제기차기를 시작하는 장면은 연대감 형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근거들이 있다. 우선, 세 사람이 코끼리 울음소리를 들은 장소는 만저우리가 아니라 버스가 잠깐 정차한 불명확한 곳이다. 즉, 후 보 감독은 세 사람이 만저우리에 도착했는지를, 그리고 만저우리에 갇힌 코끼리를 봤는지 알 수 없게끔 영화의 끝매듭을 지었다. 거기에다가 여러 사람이 제기차기를 하는 장면을 되돌아보면 화면은 버스 헤드라이트 불빛을 제외하면 어둠으로 가득했다. 이 불빛이 꺼지면 이들의 보여준 관계성은 순식간에 암흑 속으로 잠몰하므로 더는 희망을 논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게다가, ‘왕진’은 ‘웨이부’와 ‘황링’과 달리 암울한 곳을 떠나지 않고 현 상황을 개혁하자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지만,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인물이다. 이는 속물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사회문제를 지적해줄 수 있는 사람이거나 그런 의지가 있는 사람은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넌지시 알려주는 대목이다. 끝으로 분명 영화는 주인공 네 명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냈지만, 만저우리로 향하는 버스 안에 ‘위청’이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위청’은 학교폭력 가해자이자 현재 중퇴 상태에 빠진 동생의 형으로서 ‘웨이부’에게 질문 몇 개를 던지고, 대답을 들으며 성찰과 각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상황을 오해한 ‘리카이’의 총에 맞아 심각하게 다친 ‘위청’은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힘없이 앉은 채 퇴장한다. 이때 관객은 친구의 아내와 침대에 앉은 채로 등장한 ‘위청’의 첫 장면을 상기해야 한다. 앉은 상태로 출발한 ‘위청’이 중간 과정에서 나머지 주인공 세 명처럼 걷기도 하고 무언가를 깨우친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원래 상태로 회귀해 퇴장했다는 점은 사회의 잘못된 방향성을 교정할 수 있는 시민 영웅이 등장하기 어려운 현 중국을 폭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내부자의 위치에서 염세주의적이고 냉철하게 오늘날 중국의 상황을 알리자는 기조를 시종일관 유지한 작품이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