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시빌> (Sibyl, 2019)
제72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았던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시빌>은 표면적으로 심리치료사를 그만두고 다시 소설을 작업하기로 다짐했지만 ‘마고(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를 만난 후 격렬해진 ‘시빌(버지니아 에피라)’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근데, 이 영화를 그렇게만 접근한다면 ‘마고’의 연인 ‘이고르(가스파르 울리엘)’의 부탁으로 ‘시빌’이 스트롬볼리 섬에 도착한 이후 배치되는 숏들이 무의미하게 소모된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관람했다면 분명히 어색하게 느껴질 시퀀스를 후반부에서 만났을 테다. ‘시빌’이 ‘다니엘(애드리언 발메르)’과의 상담을 마친 후 시퀀스 하나가 마무리될 때쯤 ‘10개월 후’라는 자막이 걸려 나온다. 그러고 나서 놀이공원 시퀀스가 시작한다. 애매하게 삽입된 자막은 스트롬볼리 섬에서 돌아온 후 진행한 ‘다니엘’과의 상담이 10개월 동안 지속되었는지 아니면 상담을 마친 후 10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놀이공원을 방문했는지를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실 시간에 대한 모호한 태도가 <시빌>의 핵심이다. <시빌>은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복수적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때 복수적 시간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단순히 서로 개입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 미래, 그리고 상상이라는 가정법적 시제가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결합한 것을 의미한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그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유기체로서의 ‘시빌’을 그려낸다.
<시빌>이 보여주고자 하는 ‘복수적 시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간 끝에 내린 한 개인의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뿐만 아니라 기억에 관한 개념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시빌> 속 기억에 대한 개념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철학을 기반으로 삼는다. 앙리 베르그송은 연속되는 흐름 속 경험의 전체를, 즉 의식 상태의 지속을 곧 기억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베르그송은 의식은 감각과 지각을 기억하고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이런 의식상태 속 유기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지속’은 어떤 상태가 오래 계속된다는 연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상호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의식과 기억에 대한 철학적인 정의에 의하면 유기체는 의식상태 속에서 생성과 창조의 과정을 겪으며 본인만이 판단할 수 있는, 본인에게만 존재하는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 가는 존재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베르그송이 정의한 의식 상태와 지속의 개념에 미래와 가정법적 시제(혹은 상상)를 포괄할뿐더러 타자의 의식 상태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설정을 추가해 기존 철학적 정립을 발전시킨다.
소설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담당하던 환자들을 정리하던 ‘시빌’은 배우 ‘마고’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녀와의 상담을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빌’은 ‘마고’의 이야기에 더욱더 깊게 빠지는데, 겉으로는 그녀가 억누르고 있었던 욕망이 다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울러 ‘시빌’이 ‘마고’에게 ‘이고르’와의 성관계를 물으면서 전 남자친구 ‘가브리엘(니엘스 슈나이더)’과의 순간을 서서히 떠올리기 시작한다. 근데, 이 플래시백은 ‘시빌’이 지각하는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단순히 구현된 게 아니라, 비활동 상태였던 잠재된 과거가 다시 활동하면서 특정 이미지가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재구성된 것이다. 더 나아가, 과거의 기억이 반영된 ‘시빌’의 현재는 ‘마고’의 의식 상태의 영향권 아래 가정법적 시제와도 결속된다. ‘마고’가 ‘시빌’에게 ‘이고르’와 빗속에서 있었던 일을 전한다. 이는 ‘마고’의 플래시백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의식 상태에 ‘시빌’ 본인의 욕망을 투영하며 만들어진 플래시포워드다. 만약, ‘마고’의 플래시백이었다면 ‘이고르’와의 대화가 그대로 전해졌겠지만, 그녀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전달되던 특정 사건이 이미지화되는 순간 두 인물 간의 대화가 소거되었기 때문에 이는 ‘시빌’의 의식 상태가 재구성한 이미지, 다르게 표현하자면 상상이다. 이처럼 복수적 시간의 상호작용이 멈추지 않고 일어나면서 ‘시빌’은 내면적으로 활발한 운동성을 지닌 인물로 변화한다.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는 ‘마고’ 때문에 ‘이고르’는 ‘시빌’에게 스트롬볼리 섬으로 와달라고 부탁하고, 이미 활발한 내면 운동을 하는 ‘시빌’은 지체 없이 촬영 현장으로 떠난다.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후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마고’와 대화하던 중 ‘시빌’에게 이상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마고의 상황이 과거 자신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고'의 트라우마가 '시빌'의 의식 상태에 전이되며 그녀는 심적으로 계속 자극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시빌'은 촬영 현장에 개입하게 되었고, 복수적 시간 간의 긴밀한 상호 관계성을 통해 본인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을 창조하려고 한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이를 세 가지 영화 촬영 장면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촬영 장면에서는 '이고르'가 더는 노래를 못 부르겠다며 촬영 현장을 떠나자 '시빌'은 그의 자리를 대체한다. '시빌'은 자리를 대체함으로써 '가브리엘'과 자신의 연결고리를 끊고, '마고'와 새로운 연결 고리를 형성한다. 두 번째 촬영 장면에서는 '시빌'은 '이고르'의 자리에서 나와 카메라 뒤에서 '마고'가 그의 뺨을 수십 차례 때리는 걸 지켜본다. 그 장면을 보며 '시빌'은 미래에 본인이 바라는 삶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근데, 세 번째 촬영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변수가 발생한다. '시빌'은 '이고르'와 함께 해안가를 걷다가 성관계를 갖는데, 이와 동시에 '가브리엘'과의 다른 성관계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삽입된다. 이로 인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의식 상태의 연속적인 흐름이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흐름으로 변형되며 시빌’은 혼란을 느낀다. ‘시빌’은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떠안은 채 세 번째 촬영 장면에 관여하는데, 연기지만 키스와 애무를 통해 관계를 회복 중인 ‘마고’와 ‘이고르’의 모습을 목격하며 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음을 느끼며 소외감의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바라던 미래의 삶을 생성하는데 실패한 ‘시빌’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다.
격렬했던 시간을 보낸 후 ‘시빌’은 ‘마고’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끝끝내 완성해 발간했고,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내레이션으로 전한다. 하지만, ‘시빌’의 삶은 회복 탄력성을 잃었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어느 날 ‘시빌’의 아들은 자기를 볼 때마다 ‘가브리엘’이 생각나느냐고 물어보는 반면,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아들을 안아준다. 과거에 ‘시빌’은 출산한 후 후회감에 시달리며 아들을 심적으로 살해했고, 이번에 아들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한번 아들의 내면을 살해한다. ‘시빌’은 지금까지 시간 안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본인이 진정으로 바라던 삶을 창조하려고 했지만,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걸 써내려 갈 수 있는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게 자기에게 적합하다는 최종 판단을 들려준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시빌’은 더는 의식 상태의 지속을 통한 삶의 창조를 포기하고 허구적인 삶을 살기로 체념했다고 볼 수 있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