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문보 Jan 19. 2020

모호하지 않았기에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영화적 아름다움

조민재 감독의 영화 <작은 빛> (Tiny light, 2018)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357

* 작년에 인디스페이스 관객기자단 11기 활동을 하며 담당했던 '2019 으랏차차 독립영화' <작은 빛> 인디토크 기록 기사를 공유하겠습니다: https://indiespace.kr/4249


알리 아바시 감독의 영화 <경계선> (2018),  이수진 감독의 영화 <우상> (2018),  장률 감독의 영화 <후쿠오카> (2019) 등 최근에 예술영화 및 독립영화들이 모호함이 짙게 물든 쇼트를 종종 활용하거나 열린 결말로 서사를 끝맺음하려는 경향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영화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불분명함이 무조건 나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관객에게 불명확한 쇼트가 만들어낸 시공간의 가정법적인 여백 안에 숨겨진 연출자의 질문을 주체적으로 발견하고, 직접 의견을 표출하고,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같은 영화를 관람한 다른 관객들과 토론할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독이 영화를 찍고 싶지만, 어떤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싶은지 모르는 상태에 있거나,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느 정도 구상했지만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쇼트나 시퀀스를 활용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이와 같은 쇼트의 순수한 목적이 허영적인 목적으로 변질되며 영화 자체가 지닌 힘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조민재 감독의 영화 <작은 빛> (2018)은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을 받았을 정도로 대단히 우직한 작품이다. <작은 빛>은 자전적인 영화이며,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독 본인이 갖고 있었던 존재에 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감독은 이미 '만약'이라는 가정법적인 질문 위에 서 있었다. 만약, 자기 과거가 사라진다면 혹은 자신이 과거를 상실한 인간이라면, 과연 현실 세계에서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또한, 만약 아무리 본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주장함에도 타인이 자신을 기억해주지 못한다면, 유령이나 다름없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극 중에서는 뇌동맥류 수술을 받아야 하는 '진무(곽진무)'가 수술 후에 기억을 잃을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기억해야 하는 것을 캠코더에 담는 행위로 표현된다. 그리고 조민재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 (1995)처럼 타인의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을 자기 삶의 영역 안에 끌어들이는데, 극 중에서 기억나지 않던 아버지를 떠올리는 진무를 중심으로 가족의 의미를 재고한다. 



진무의 캠코더에 담긴 가족의 모습은 이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즉, 가족이라면 하나로 묶여야 한다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에서 벗어나 있다. 엄마 '숙녀(변중희)', 누나 '현(김현)', 형 '정도(신문성)' 등의 삶은 멀리서 바라보면 그저 평범하거나 하찮아 보이겠지만, 캠코더의 줌인 화면처럼 조금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이들 역시 자신만의 삶이 따로 있고 어떻게든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무가 엄마 집의 낡은 전등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준 다음 점프 컷으로 암전, 누나의 일상, 암전, 형의 일상을 단편적으로 모아 완성한 시퀀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스크린 밖에 있는 촬영 카메라의 화면 안에 캠코더 화면이 들어올 뿐만 아니라 캠코더 영상과 아버지의 오래된 카메라 속 사진 간의 질감적 차이는 각자의 삶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물음표나 지배하고 있는 공기가 교차할 수 있지만, 결국 하나로 수렴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존재에 대한 고민이 점차 해결될뿐더러 가족은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을 이해하거나 삶에 생긴 간극을 채울 수 있게끔 인도하는 존재임을 지각하게 된다. 



후반부에 진무의 가족은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하려는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도 진무가 조용히 나서서 해결하고, 유골을 상자에 담아 앞장서는 장면은 비록 삶은 다른 삶과 합치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지만, 조금이라도 자기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작은 빛이 지닌 따뜻함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조민재 감독은 자전적인 고민을 우직하게 끌고 가는 자세를 잃지 않고, 이를 진솔함으로 승화했기에 <작은 빛>이라는 또 다른 진정으로 아름다운 독립영화가 완성된 게 아닐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트면 설 곳이 없을 리베르탱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