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인디의 두 사람: 존 카사베츠와 셜리 클라크' 기획전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시대는 주관적 체험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영화 <현기증> (1958), <새> (1963) 등 여러 작품에서 시점 숏과 반응 숏으로 이뤄진 주관적 편집을 통해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편집으로 숏의 지속 시간을 줄임으로써 극 중 인물의 강력한 심리적 및 정서적 반응을 얻어내고, 관객은 이런 인물의 내면 상태에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시대가 쇠퇴기에 접어든 1950년대에 독립적인 제작 방식을 시도하는 젊은 감독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존 카사베츠 감독이다. 존 카사베츠는 알프레드 히치콕과 달리 시점 숏을 썼다고 해서 그다음에 반응 숏을 붙이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자면, 주관적 편집으로 관객을 프레임 안 주요 인물의 심리에 가두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익숙한 감정 및 공간을 낯설게 묘사하고, 인물의 기분이나 움직임을 따라가는 즉흥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관습적인 영화문법에서 웃음은 상대방과의 상호 의사소통과 긍정적인 기류를 가리키지만, 존 카사베츠의 영화 <얼굴들> (1968)에서 웃음은 상처를 입은 인물들과 정서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부정적인 부산물을 남긴다.
아울러 가족이나 친구는 일반적으로 유대감을 상징하거나 상처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관계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관계 또한 존 카사베츠의 영화에서는 탈출구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얼굴들>에서 ‘리처드(존 말리)’와 ‘마리아(린 칼린)’은 결혼생활을 14년간 충실히 했지만, 클로즈업 숏의 연속은 중산층 부부 관계의 분열을 그려낸다. 결말에서 두 인물은 같은 계단 위에 앉아 흡연하지만, 계속해서 엇갈리거나 평행하게 위치함으로써 이를 입증한다. 이와 같은 관계 활용은 영화 <영향 아래의 여자> (1974)로 이어진다. ‘메이블(지나 롤렌즈)’과 ‘닉(피터 포크)’는 아이 세 명을 둔 미국 중산층 부부다. 두 인물은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메이블’은 이 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낄뿐더러 소통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술에 취한 상태로 만난 남자를 다음날에 남편으로 인식하거나, 자기를 피하는 거리 위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등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는 ‘메이블’은 거듭해서 불안과 고독을 드러낸다.
극 중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선율과 함께 날갯짓하듯 춤을 추는 ‘메이블’의 모습이 두 번 나온다. 이 춤은 한 개인으로 살고 싶은 무의식적 표출이다. 그러나 ‘메이블’은 날 수 없는 백조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두 차례에 걸친 춤 전부가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춤은 뒷마당 파티 시퀀스에서 진행된다. ‘메이블’은 아이들에게 ‘젠슨(판초 마이젠하이머)’ 씨를 위해 죽어가는 백조를 표현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아무런 문제점을 자각하지 못하는 ‘메이블’의 행태는 남성에게 억압을 당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사고가 이미 착근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춤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메이블’이 집에 돌아온 후 진행된다.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발작적 반응이 재발하였고, ‘메이블’은 소파 위로 올라가 ‘백조의 호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독무한다. 그러자 ‘닉’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그녀를 힘으로 제압한다. 무력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두 인물의 관계에 상호 이해가 배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이블’은 ‘닉’이 정한 규칙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메이블’의 삶은 1879년에 헨릭 입센이 발표한 『인형의 집(Et dukkehjem)』의 주인공 ‘노라’의 삶과 비슷하다. 춤 장면 이외에서도 ‘메이블’이 ‘닉’의 인형과 다름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닉’의 동료들은 ‘메이블’이 미쳤다고 생각하자, ‘닉’은 아내가 미친 게 아니라 그저 독특할 뿐이라고 편든다. 표면적으로 ‘닉’이 아내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본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아내의 상태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침에 공사 현장 동료들을 집에 초대하는 장면과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메이블’을 위해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을 또 다른 예시로 제시할 수 있다. 아침부터 동료들에게 스파게티를 대접하는 ‘닉’의 모습은 본인 가정도 정상적임을 보여주려는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퇴원한 ‘메이블’을 위해 대규모 파티를 열려는 의지는 겉으로 아내를 향한 정성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형적인 가족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과 유관하다. 더 나아가, 친인척이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닉’은 ‘메이블’에게 농담을 하지 말고, 날씨, 안부 묻기 등 일상 대화를 하자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날씨나 안부를 묻는 담화는 어색하지 않다. 그렇지만, 화용론적으로 분석하면, ‘닉’이 요구하는 일상 대화는 폭력적이다. 왜냐하면 이 대화에서 테마는 ‘닉’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졌고, ‘메이블’은 그의 통제 아래 담화를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건축적인 특징은 ‘메이블’이 인형의 삶을 살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 부부의 침실이자 ‘메이블’의 사적인 공간이 1층에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세 가지 있다. 첫 번째 특징은 침실이 곧 식당이라는 점이다. 침실은 피로를 해소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손님이 갑작스럽게 방문하면, 쉬지도 못하고 침실을 음식 대접하는 자리로 전환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스트레스는 당연히 축적되고, 결국 신경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특징은 ‘ㅁ’ 자 구조로 침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통로, 부엌, 그리고 화장실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ㅁ’ 자 구조에 ‘메이블’의 집안일을 반영한다면, 침실에서 일 마치고 귀가하는 남편을 기다려야 하고, 세 자녀를 2층에 데리고 올라가 잠재워야 하고, 부엌에서 요리와 설거지를 해야 하고,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하는 ‘메이블’의 일과가 반복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더군다나, 침실 안 문에 ‘PRIVATE’라는 푯말이 붙여져 있지만, 문을 열면 곧바로 부엌과 화장실이 보인다는 점에서 ‘메이블’에게 자유가 없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마지막 특징은 부엌 방향을 제외하면 침실의 삼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록 블라인드나 커튼이 설치되어 있지만, 외부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 고로 남편이 없을 때 ‘메이블’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를 받게 된다. 언급한 특징들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메이블’이 자아가 없는 객체로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후반부 부부의 관계는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영향 아래의 여자>가 감성적인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따랐다면, 잠자리를 준비하며 미소 짓는 둘의 모습을 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테다. 그렇지만,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존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외형적인 웃음은 인물의 정서와 불일치하다. 그러므로 둘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었는지 끝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메이블’의 거주 환경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헤아려 보면, 죽음의 위협이 언제나 ‘메이블’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울러 죽음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시간문제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