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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May 29. 2020

'엘라이자'는 '엘라이자'가 되지 못했다

오드리 헵번 특별전: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1964)


조지 큐커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1964)는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 중 하나로,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Pygmalion, 1913)을 원작으로 삼았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시스템에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방식을 더해 제작되었고, 이 결과물은 제3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8관왕의 영예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영화가 원작의 의도를 꿰뚫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작품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Fabian socialist)로서 교육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분리된 계급과 영혼을 결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토대로 그는 『피그말리온』에서 음성학 교수 ‘히긴스’와 하류층 여성 ‘엘라이자’ 간의 이항 대립적 관계 및 속성을 설정한다. 물론 <마이 페어 레이디>는 이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도 영국의 계급 편향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적 신분은 유전이 아닌 교육과 환경에 따라 변동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어렴풋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결말을 답습하면서 원작의 의도와 캐릭터의 존재를 유명무실화한다.



원작에서 ‘히긴스(A)’와 ‘엘라이자(B)’의 ‘관계(A-B)’는 ‘주는 자–받는 자’, ‘교사–학생’, ‘의사–환자’, 그리고 ‘연구자-실험체’로 정리할 수 있다. ‘히긴스’는 능동적이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제공하는 위치에 있지만, ‘엘라이자’는 자유를 잃은 채 수동적으로 무언가를 수행해야 한다. 영화는 이와 같은 관계를 최대한 원작에 가깝게 묘사한다. 예를 들어, ‘엘라이자(오드리 헵번)’가 비를 맞으며 바구니에 든 꽃을 사달라고 구걸하자, ‘히긴스(렉스 해리슨)’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대신에 5파운드를 주고 ‘피커링(월프리드 하이드-화이트)’과 거리를 떠난다. 이 돈은 상류층의 하류층에 대한 연민으로 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5파운드는 ‘히긴스’가 본인 전공을 살려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증명하는데 필요한 ‘엘라이자’를 자택으로 유혹하고, 실험체로 삼기 위한 종잣돈이다. 의도대로 ‘엘라이자’가 방문하자 ‘히긴스’는 6개월 안에 그녀를 교육해 상류층 신분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놓고 ‘피커링’과 내기를 한다. 이처럼 몇 차례 만나는 과정에서 ‘엘라이자’는 계속 한낱 사물에 불과하다. 



원래 ‘엘라이자’는 낮은 신분에도 자기 삶에 만족하고, 주체적이고, 계급에 굴복하지 않고, 성 평등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히긴스’는 남성 우월적인 생각과 아집을 버리지 않고, ‘엘라이자’가 좋아하는 초콜릿으로 조련해 자기가 뜻한 바를 이루고자 한다. ‘엘라이자’는 ‘히긴스’의 집에서 인형으로 살아간다. 왜냐하면 인형 놀이처럼 ‘히긴스’가 입으라는 드레스만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상 음성학과 관련된 다양한 도구들에 둘러싸여 지내고, 온종일 기계에 묶여 발음 교정 연습을 한다는 점에서 ‘엘라이자’는 수많은 기계 중 하나이자 실험 쥐나 마찬가지다. 혹은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데, ‘엘라이자’가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을 때 ‘히긴스’가 면전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새장에 갇힌 새에게 주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작의 경우 ‘엘라이자’의 1차 검증 장소는 ‘히긴스’ 어머니의 사교 모임이다. 하지만, 영화는 두 인물의 관계를 부각하기 위해 경마장으로 각색했다. 경마장에서 ‘엘라이자’는 경주마를 바라보고, ‘히긴스’는 그런 그녀를 지켜본다. 이런 시선의 연결은 ‘엘라이자’가 ‘히긴스’의 실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경주마라는 점을 나타낸다. 1차 검증 무대에서 가능성을 보이자 ‘히긴스’는 ‘엘라이자’를 더욱더 강하게 교육해 2차 검증 장소인 무도회로 보낸다.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엘라이자’를 헝가리에서 온 여왕으로 착각하고, 그 광경을 지켜본 ‘히긴스’는 즐거워한다. 그리고 집에서 ‘피커링’과 함께 축배를 든다. 이때 프레임 안 ‘엘라이자’의 위치에 주목해야 한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지친 ‘엘라이자’는 칭찬은 아니더라도 위로나 격려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만, ‘히긴스’는 자기 공을 자랑하느라 그녀가 어디에 서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엘라이자’는 프레임 양쪽 구석에 가만히 서서 소외되고, 카메라는 가무를 즐기는 두 신사를 따라가느라 다음 장면에서 ‘엘라이자’를 프레임 안에 담지 못한다. 여기까지 <마이 페어 레이디>는 약간의 각색을 통해 원작의 설정에 충실히 따른다.   



그런데, 영화는 『피그말리온』이 피그말리온 신화와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Et dukkehjem, 1879) 중에 어느 이야기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조지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을 창작할 때 피그말리온이 자기 이상적 가치가 투영된 여인 조각상을 만들어 결혼했다는 신화를 기반으로 ‘히긴스’가 ‘엘라이자’를 완벽하고 예의 바른 여성으로 교육한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피그말리온』은 『인형의 집』과 하나로 묶이는 희곡이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남편의 인형으로 살아가는 삶을 깨닫고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집을 떠나듯이, 『피그말리온』에서 ‘엘라이자’는 ‘히긴스’ 덕분에 신분 상승을 이룰지언정 인권과 평등권이 짓밟히는 삶에 잠몰되지 않고자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다. 즉, 원작의 핵심은 주체성, 독립심, 평등 등이다. 하지만, 영화는 신데렐라 유형 설화 및 감성적인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답습하면서 원작의 의도를 완전히 헤아리지 못했을뿐더러, 캐릭터를 모순에 빠지게 만든다.



언급했듯이 원작에서 ‘엘라이자’는 ‘노라’처럼 본인을 사물 취급하는 공간에서 제 발로 나와 본인의 꿈을 성취하고자 한다. 게다가, 그녀는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가부장권을 거부해 왔다. ‘히긴스’는 영국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변화를 이끌어내지만,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발언을 쉽게 내뱉고, 여성 혐오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 인물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중후반부까지 원작에 충실하며 두 캐릭터가 원작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보전하지만, 주연 캐릭터 간의 사랑이 곧 해피엔딩이라는 관습을 놓지 못하면서 모순을 남긴다. 여성을 혐오하고, 본인밖에 모르던 ‘히긴스’가 집에서 ‘엘라이자’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그리워하고, 주체적인 삶을 미래의 꿈으로 삼았던 ‘엘라이자’가 갑자기 ‘히긴스’의 집에 방문해 그와 포옹하는 장면은 원작을 배제하고 봐도 굉장한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결국, <마이 페어 레이디>는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서 출발했지만, 전통적인 멜로드라마 구성을 답습함으로써 신데렐라 유형 설화에 발이 묶인다. 그렇게 ‘엘라이자’는 ‘엘라이자’가 되지 못한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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