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림 아이노우즈 감독의 영화 <인비저블 라이프> (2019)
제7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영화 <인비저블 라이프> (2019)는 카림 아이노우즈 감독이 2015년에 출간된 마르타바 탈라 작가의 동명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서간체 형식으로 진행되며, 언니 ‘귀다(줄리아 스토클러)’와 동생 ‘에우리디스(캐롤 두아르테)’의 1950년부터 2010년대까지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근데, <인비저블 라이프>의 특이점은 1960년대부터 50년 이상의 시간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귀다’와 ‘에우리디스’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이 가까운 사이지만, 거시적인 부분(브라질의 상황 및 계층 문제)과 미시적인 부분(가족 문제)이 자매를 동시에 옥죈다. 자매는 잔인한 운명에 좌절하지만, 쉽게 굴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인비저블 라이프>는 단지 아름다운 여성 서사로만 기억할 수 있는 영화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극 중∙후반부, 아웃 포커스된 ‘에우리디스’의 모습과 함께 끝난 1950년대의 이야기, 그리고 2010년대 이야기의 출발점이 집이 아닌 요양원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 상황과 관련된 알레고리는 자매가 경험한 비극을 은유적이면서도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Ⅰ. 국가, 비극
1951년 브라질에 제툴리우 바르가스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환율 하락과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경제가 악화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국민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상류층은 바르가스 정권이 교체되기를 원했으며,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젊은 세대는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브라질에 희망이 없다고 믿기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귀다’가 항해사 ‘요르고스(니콜라스 안투네스)’와 함께 그리스로 떠나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귀다’가 ‘요르고스’에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건 맞지만, 그를 안 지 얼마 안 되어서 가족을 두고 브라질을 떠났다는 것은 ‘요르고스’를 사랑의 대상 이전에 유럽으로 탈출할 기회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에우리디스’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언니처럼 유럽으로 떠나 피아니스트의 꿈을 이루기를 희망한다. 다만, ‘에우리디스’는 ‘요르고스’와 같은 상대방이 없기에 그럴 수 없을 뿐이다.
그리스에 정착하지 못한 ‘귀다’는 브라질로 돌아온다. 브라질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카림 아이노우즈 감독은 심해진 브라질의 계층 격차를 묘사하기 위해 리우데자네이루를 핵심 배경으로 삼았다. 그는 관광명소라는 이미지 메이킹으로 완성된 리우데자네이루의 실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영화에서 리우데자네이루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철저히 분리되었고, 주변부로 밀려난 ‘귀다’와 중심부에 주재하는 ‘에우리디스’의 상황이 교차 편집으로 묶인다. 대단히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아버지 ‘마노엘(안토니오 폰세카)’은 홑몸이 아닌 ‘귀다’를 매몰차게 쫓아낸다. ‘귀다’는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촌을 돌아다니다가 그곳에 정착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실질적인 계층 하락을 겪는다. ‘에우리디스’는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아버지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한다. 자유 의지를 박탈당한 ‘에우리디스’의 상황을 논하기 앞서서, 어쨌든 결혼은 그녀를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심부에서 벗어나지 않게 만든다. 이렇게 당시 빈부격차가 형상화된다.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매의 빈부격차를 레스토랑 장면에서 더욱더 적나라하게 나타낸다. ‘귀다’는 아들 ‘치코’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레스토랑을 방문한다. 그런데, 종업원은 ‘귀다’가 빈민층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장을 거부한다. 반면, ‘에우리디스’는 아버지를 모시고 딸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낸다. 아울러 ‘귀다’가 잠깐 레스토랑 내부에 있을 때 ‘에우리디스’는 화장실에 있고, ‘에우리디스’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귀다’는 레스토랑을 떠나는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두 사람의 투 숏이 이뤄지지 않게 한다. 1964년 움베르토 지 알렝카르 카스텔로 브랑코의 군부 통치가 시작되었고, 민중을 위한 국가상과 멀어져 간다. 브라질은 대지주와 부자를 위한 나라가 되었고, 뇌물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국가가 되었다. 자매의 운명은 국가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품은 희망은 회복하기 힘든 수준으로 가시권에서 벗어났을 테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나 다름없고, 감독은 과감한 시간 생략으로 이를 시각화한 것이다.
Ⅱ. 가족, 비극
프롤로그에서 ‘귀다’와 ‘에우리디스’는 소풍을 떠난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서 ‘귀다’가 숲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에우리디스’는 언니 이름을 외치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장면이 전환된다. 프롤로그는 자매가 곧 갈라져 지내게 될 것이고, 이별 후에는 상대방의 행적을 추적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부, 딸의 앞날보다 가족의 명예를 우선시하는 아버지 때문에 지친 ‘귀다’는 ‘에우리디스’의 도움을 받아 몰래 ‘요르고스’와 춤을 추러 클럽에 간다. 두 사람이 도착한 클럽에는 정말 많은 거울들이 있었고, 화려한 조명 덕분에 아름다워 보인다. 그런데 거울에 반사된 수많은 ‘귀다’의 이미지들은 실제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만든다. 또한, 반사 이미지들은 진짜 ‘귀다’를 포박하듯이 에워싸고, 이는 그녀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예고한다. ‘에우리디스’는 약속 시간이 지났음에도 ‘귀다’가 귀가하지 않자 언니가 택시를 탔던 장소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택시가 없었다.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에우리디스’는 공허감을 응시하며 방으로 돌아간다. 이때 땅에 떨어진 귀걸이 한쪽을 발견한다. 이 시점부터 자매의 투 숏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점프 컷을 활용해 ‘에우리디스’의 결혼식 장면으로 넘어간다. 남편 ‘안테노(그레고리오 뒤비비에르)’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가부장적이다. 또한, ‘에우리디스’가 느끼는 내면적 방황과 공허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조차를 하지 않는다. ‘안테노’는 ‘에우리디스’의 꿈을 조롱하고, 그녀가 아이를 키우며 가정에 헌신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태도는 혼야 때부터 드러난다. 두 사람의 첫 성관계는 침대도 아닌 화장실 바닥에서 진행된다. ‘안테노’는 찬 기운이 흐르는 화장실 타일 위에 누운 ‘에우리디스’의 표정을 살피지 않는다. 그는 그저 본인의 쾌락을 느끼는 일에 급급하다. ‘에우리디스’는 무표정했고, 그녀의 텅 빈 얼굴은 ‘안테노’의 금수 같은 소리로 채워진다. 다음 날 아침 ‘에우리디스’는 혼자 산책을 한다. 그녀는 걷다가 수영장에 앉아 멍 때린다. 본능에 충실한 ‘안테노’는 성욕을 해결한 후 잠에 빠져 있다. 따라서 그는 ‘에우리디스’의 공허감이 표출되는 순간을 당연히 목격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요르고스’의 여성 편력을 알게 된 ‘귀다’는 그리스에서 귀국한다. 아버지 ‘마노엘’은 홀로 임신한 채로 돌아온 ‘귀다’를 가문의 수치로 생각해 그녀를 집에서 영원히 쫓아낸다. ‘귀다’는 병원에서 ‘치코’를 출산하고 곧장 클럽에 간다. 그녀가 노는 것에 미친 인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요르고스’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행위로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클럽에서 마주한 건 세상의 역겨움과 더러움이다. 클럽 화장실에서 그녀는 모유가 새는 걸 모르는 남자 앞에서 보여줄 뿐만 아니라,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타인의 성적 행위를 돕는다. 초라한 상황과 비좁은 화장실 계단 구조는 그녀의 어두운 표정과 결합하여 비참한 심정을 이미지화한다. 클럽에서 나온 ‘귀다’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고, 병원으로 돌아가 포기하려고 했던 아들 ‘치코’를 데려간다. 같은 날, ‘에우리디스’도 마찬가지로 암울함에 빠진다. 그녀는 ‘안테노’ 때문에 원치 않은 성관계를 맺었고, 심신은 갈기갈기 찢겼다. 특히, ‘안테노’는 ‘에우리디스’가 아끼는 피아노 건반 위에서 성관계를 맺으려고 했는데, ‘에우리디스’의 입장에서는 자기 분신을 더럽히는 행위다. 그녀는 ‘안테노’를 타일러 소파에서 성관계를 맺었지만, 제대로 피임하지 않은 사실에 분노한다. 뒤늦게 성기를 세정했지만, 불행히도 첫 아이를 잉태했고, 그날 이후 ‘에우리디스’가 빈 공간, 빈 사물 등을 응시하는 날이 빈번해졌다.
자매의 불행을 끝낼 수 있는 수단은 편지다. 임대형 감독의 영화 <윤희에게>(2019)를 떠올려 본다면, ‘윤희(김희애)’와 ‘쥰(나카무라 유코)’를 이어주는 것은 기차와 편지다. 하지만, <인비저블 라이프>에서 편지는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귀다’가 보내는 편지의 수신자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에우리디스’가 아닌 오스트리아 빈으로 음악 유학을 하러 간 ‘에우리디스’, 즉 허구의 ‘에우리디스’이기 때문이다. 명예가 우선인 아버지 ‘마노엘’은 자매의 재회를 방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귀다’는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동생과 관련된 이야기만큼은 믿었다가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물론 중간에서 ‘귀다’의 편지를 받는 어머니가 이 비극을 종결할 수 있지만, 어머니 또한 가부장제의 꼭두각시이므로 딸들에게 진실을 알려줄 수 없다. 이제 자매가 재회할 방법은 ‘귀다’가 가상의 ‘에우리디스’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하는 것밖에 없다. 만약 ‘귀다’가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해 진짜 ‘에우리디스’가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면, 브라질로 돌아와 편지 작성을 그만두고 다른 방식을 취했을 테다. 불행히도, 마지막 기회마저도 가부장제에 의해 무산된다. 왜냐하면 ‘남성 보호자가 없는 ‘귀다’와 ‘치코’는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회 가능성이 사라진 채 시간이 흘렀고, ‘에우리디스’의 내면은 초토화되었다. 이때 그녀의 상상이 삽입된다. 상상 장면에서 ‘에우리디스’는 신부복을 입고 있으며, ‘귀다’는 동생 앞에서 춤을 춘다. 이 장면은 ‘에우리디스’에게 ‘귀다’는 정신적인 지주이자 플라토닉적 관계임을 강조하는 반면,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이 판타지로 발현되었음을 이야기한다. 판타지가 끝나자 ‘에우리디스’는 자기가 아끼는 피아노를 포함한 온갖 물건들을 소각한다. 감독은 아웃 포커스를 통해 ‘에우리디스’의 내적 상태를 묘사하고, 1950년대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페이드인과 함께 시간 배경이 2010년대로 바뀐다. ‘에우리디스’는 자식의 도움을 받아 남편의 유물을 정리하던 중 ‘귀다’의 편지뭉치를 발견한다. 편지에 적힌 발신지로 가니까 그곳엔 ‘귀다’의 손녀가 있었다. ‘에우리디스’는 ‘귀다’의 손녀 앞에서 언니에 관해 이야기하며 사라진 긍정의 감정을 회복하는 듯해 보인다. 그러하나 ‘에우리디스’가 편지에서 마주하는 건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왜냐하면 편지 속 ‘에우리디스’의 삶은 현실 세계 속 삶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편지의 지연이 지닌 재회 불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인비저블 라이프>를 아름다운 영화로 간직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여성 드라마로서 갖는 의의를 찾는다면, 숨겨진 여성들의 역사를 공유하고, 이를 통해 21세기에서도 여성들이 겪는 비극을 끊자는 간절한 호소이지 아닐까 싶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