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통행증> (Transit, 2018)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 <트랜짓> (2018)은 제68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으며, 망명 문학의 한 정점을 이뤘던 안나 제거스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 소설 『통과비자』 (Transit)는 안나 제거스가 1940년에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마르세유에서 멕시코로 이동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완성되었다. 안나 제거스는 예술가로서 현실을 직접 부딪치며 체험하고, 이를 텍스트로 표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본인이 경험했던 위기의 현실을 통과적인 삶(Transitärleben)으로 그려냈다. 한편, 말미에는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정든 땅에서 피 흘리며 죽는다고 해도, 베어내고 뽑아내려는 덤불들과 나무들에서 새 생명이 나오듯이, 죽은 거기로부터 무언가가 계속 자라나 올 것이다’라는 문장을 전함으로써 나치즘과 싸움에서 패배하더라도, 피와 땀이 헛되이 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낳을 거라는 낙관적인 메시지를 남긴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소설을 각색할 때 낙관성을 축출하고, 비관적인 분위기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뒀다.
우선, 소설에서는 화자의 도움을 통해 망명을 떠난 캐릭터가 영화에서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 일찍 퇴장한다. 이로 인해 통과(Transit)의 세계에 띠는 부정적인 양상이 마르세유에서의 이야기가 전개되기 전에 미리 드러나고, 떠도는 자들의 비극이 일찌감치 깔린다. 또한, 소설에서 불투명한 혼돈의 세계를 환기하기 위해 설치했던 멜로드라마의 특징에 ‘떠난 자와 남겨진 자 중 누가 상대를 먼저 잊을까?’라는 질문과 결부하여 통과자(Transitär)가 마주하는 비극성을 부각한다. 무엇보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문제를 보여주고자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영화 <행복한 라짜로> (2018)처럼 아나크로니즘 양식을 채택했다. 1940년대 속 등장인물과 그들의 이야기를 21세기 배경으로 이동시켰을 뿐, 그대로 다룸으로써 나치 정권이 출범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부터 시작된 독일인의 실존적 고민이 현재 진행형임을 역설한다.
수용소 탈출 이후로 나는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했다. 과거의 것이 나에게는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아직도 늘 반쯤은 도주 중이었고 반쯤은 숨어지냈다.
- 안나 제거스, 『통과비자』, 이재황 옮김, 창비, 2014, p. 24
파울이 물었다. “무슨 계획을 갖고 있어?” 나는 그에게 계획을 세운 게 없으며 미래가 짙은 안개 속처럼 뿌옇다고 자백해야 했다.
- 안나 제거스, 『통과비자』, 이재황 옮김, 창비, 2014, p. 28
소설 속 묘사처럼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는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주변 사람이 무언가를 제안하면 그저 따를 뿐이다. 심지어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프랑스가 망명 온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법을 시행해도, ‘게오르그’는 프랑스를 탈출할 생각이 딱히 없다. 영화는 의욕 없이 대낮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친구 ‘파울(제바스티안 훌크)’이 근처 호텔에 묵고 있는 ‘바이델’ 씨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게오르그’는 심부름을 하러 나선다. 그러나 호텔에 도착했더니 ‘바이델’은 이미 목숨을 끊었기에 편지를 전해줄 수 없었다. ‘게오르그’는 얼떨결에 ‘바이델’의 원고와 문서들을 챙기고 다시 카페로 향했는데, ‘파울’과 다른 독일인들이 프랑스 경찰에게 체포된 광경을 목격한다. ‘게오르그’는 그 자리를 빨리 피해서 다른 동료들이 있는 숙소에 도착했는데, 부상이 심한 ‘하인츠’를 가족이 있는 마르세유에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하인츠’는 숨을 거뒀고, 그렇게 ‘게오르그’는 이 지역에 있을 명분을 잃는다. 수중에 남은 건 ‘바이델’의 작품 원고와 멕시코로 망명해도 괜찮다는 영사관 측 편지뿐이었다. ‘게오르그’는 이 서류들을 멕시코 영사에게 갖다 주려고 멕시코 영사관을 방문한다. 그런데 영사는 그를 ‘바이델’로 착각한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오르그’는 죽은 자의 가면을 쓰게 되고, 본인의 정체를 은폐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이때부터 ‘게오르그’는 통과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다들 언제나 죽음을 피해, 다시 죽음 속으로 도주 중에 있었다.
- 안나 제거스, 『통과비자』, 이재황 옮김, 창비, 2014, p. 123
마르세유는 통과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는 항상 죽음의 공기가 흐른다. 왜냐하면 통과자들은 유럽 대륙을 떠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세적인 가치를 포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무의미하고 맹목적인 탈출 시도를 거듭하면서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실존적 위기를 겪는데, 그 모습은 마치 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살아 있는 자의 얼굴을 하며 부유하는 유령과 같다. 특히, 통과자들에게 필요한 통과비자(Transitvisum)가 경유하는 국가에 정착하지 않고, 곧 떠날 것임을 증명하는 비자라는 점에서 그들의 삶은 곧 유령으로 사는 삶이다. 근데, 통과자들을 받기로 한 국가들은 사실 그들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각각의 국가의 영사관은 망명을 요청하는 통과자들을 대상으로 통과 비자, 체류 허가증 등과 관련된 복잡한 절차를 요구한다. 또한, 동물을 동반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동물 검역증을 발급받기 위한 절차를 제시하고, 망명국에서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는 이력서, 보증서 등 추가적인 서류를 요구한다. 통과자들은 절박하기에 영사관이 요구하는 절차를 곧이곧대로 밟는다.
그렇지만, 이들이 서류 준비를 완료하더라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영사관이 제시한 절차는 통과자들이 지루한 기다림과 싸우다가 지쳐 떨어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서류마다 각기 다른 유효 기간이 정해져 있고, 절차 중에 어떤 서류가 기간 만료가 되면, 그 서류를 다시 신청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서류의 유효 기간이 끝나게 되어 원점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작업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영화는 늙은 지휘자와 개 두 마리를 키우는 여성의 에피소드를 통해 이와 같은 문제를 표출한다. 관료주의의 늪은 통과자들을 끝이 없고 무의미한 행동에 집착하게 만들고, 자신을 소모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이들의 탈출 시도에서 나타나는 반복성은 발전의 불가능성과 목표의 상실을 상징하고, 무력감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파멸을 겪은 통과자들은 극에 달한 실존적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한다.
모든 것이 도주 중에 있었고, 모든 것이 지나가버리는 것에 불과했다.
- 안나 제거스, 『통과비자』, 이재황 옮김, 창비, 2014, p. 55
관료주의의 폐해를 제외하면, 통과의 세계에는 배반 현상이라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통과의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생존을 위한 탈출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도주 중일뿐더러, 타인은 지나가 버리는 대상에 불과하다. 만약, 타인에게 관심을 두더라도, 결국 생존이 우선이기에 상대방을 배반한다. 즉, 통과의 세계에는 배반이 언제나 잠재되어 있다. 극 중에서는 ‘마리(파울라 베어)’가 남편 ‘바이델’을 배반했고, ‘리차드(고데하르트 기에세)’는 본인의 직업 때문에 ‘마리’를 배반할 마음이 갖고 있다. ‘게오르그’는 ‘하인츠’의 아들과 아내이자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망명자인 ‘드리스(릴리언 뱃맨)’와 ‘멜리사(마리엄 자리)’의 기대를 저버린다. 물론, ‘게오르그’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그들에게 잊고 있던 연대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드리스’에게 새 축구공을 선물하고, 고장이 난 라디오를 고쳐주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맞춰 유년 시절의 노래를 공유하는 장면에서 연대감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만나기 전에 마르세유 거리에서 ‘마리’를 먼저 만났던 ‘게오르그’는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고, 결국 그들을 포기한다. 이처럼 통과의 세계에서 배반 현상은 세포 분열이 일어나듯이 퍼지고, 황폐화 혹은 해체된 내면 때문에 비인간화되어 가는 망명자들의 수가 증가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이런 세계를 더 깊게 구현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멜로드라마의 테마를 활용한다. 그냥 주어진 상황에 따라 살아왔던 ‘게오르그’는 ‘마리’를 알게 된 후 함께 멕시코로 떠나 평온한 삶을 꾸리고 싶어졌다. ‘리차드’는 ‘마리’를 사랑하지만, 직업과 명예가 더 중요하기에 내적 갈등을 겪는다. 남편 ‘바이델’을 배반했던 ‘마리’는 후회의 감정을 느끼는데, 그의 사망 소식을 모른 채 매일 마르세유 곳곳을 돌아다닌다. 영화는 이들의 관계에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중에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라는 질문을 결부시킨다. 이 질문은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중에 누가 상대를 잊지 못하고 괴로워할까?’로 바꿀 수 있다. ‘게오르그’는 ‘리차드’와의 사랑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 ‘마리’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랑싸움에서 최후 승자는 ‘게오르그’와 ‘리차드’도 아닌 죽은 ‘바이델’이다. 마르세유를 돌아다니고 있는 ‘바이델’이 ‘게오르그’라는 사실을 모르는 ‘마리’는 그의 경로를 매일 따라다녔고, ‘게오르그’는 이를 관계의 발전으로 믿었다. 그렇지만, ‘리차드’가 먼저 멕시코로 떠나기로 하고, 단둘이 남았을 때 ‘마리’는 ‘게오르그’에게 마르세유에 남아 남편을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비로소 ‘게오르그’는 본인의 착각을 깨닫는다. 이와 동시에 이 사랑싸움에서 패배했음을 눈치챈다.
죽은 자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권한에 속한 것을 영원히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더 강했다.
- 안나 제거스, 『통과비자』, 이재황 옮김, 창비, 2014, p.367~368
며칠이 지나 ‘게오르그’는 이 패배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혼자서 멕시코로 떠나기 전날에 ‘마리’가 몽벵뚜 식당에 찾아와서 함께 망명을 하자고 한다. 이에 ‘게오르그’는 그녀가 ‘바이델’을 포기하고 본인과의 사랑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출항 당일 항구로 가는 택시 안에서 ‘마리’는 현재 기쁜 감정을 과거 남편이 뉴욕에서 성탄절 선물로 코트를 사줬을 때 느꼈던 감정에 비유하자, ‘게오르그’는 같이 멕시코에 가더라도 끝내 그녀를 붙잡을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한다. 아울러 파리에서 목격했던 ‘바이델’의 극단적인 선택과 그 의미를 깨닫는다. ‘바이델’이 홀로 파리에 남아 ‘마리’를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택했던 것이었다. ‘게오르그’는 급한 일이 있다며 택시에서 내리고, ‘마리’를 항구로 보낸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게오르그’는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중에 누가 상대를 먼저 잊을까?’에 대한 이전 대답을 바꾼다.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 감정이라도 지키기 위해 본인도 ‘바이델’처럼 남겨진 자가 되어 그녀를 그리워하기로 결심한다.
그때 바로 몬트리올호가 침몰했다는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 배는 아득히 먼 옛날에 떠난 것처럼 여겨졌다. 영원히 떠돌며 항해와 침몰을 무한히 반복하는 전설 속 배와도 같았다. ∙∙∙ 나는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문을 등지고 앉았다. 하지만 문이 열릴 때마다 예전처럼 움찔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매번 내 앞의 하얀 회벽에 드리우는 새로운 희미한 그림자를 어림해 보았다. 조난자들이 뜻밖에도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어느 해안가에 나타나거나 죽은 이의 혼백이 희생제의와 열렬한 기도의 힘으로 지하세계에서 빠져 나오듯이, 마리도 불쑥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를 일이다.
- 안나 제거스, 『통과비자』, 이재황 옮김, 창비, 2014, p. 382
‘게오르그’는 마르세유에 잔류한다. 그러나 영화 속 ‘잔류’는 소설과는 다른 함의를 가진다. 소설에서 ‘잔류’는 통과의 세계와 이별하고, 평범한 세계에 편입하여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위해 싸우는 것을 상징한다. 이와 반대로, 영화에서 ‘잔류’는 죽음 직전의 단계다. ‘바이델’의 최후를 떠올려 본다면, 남겨진 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게오르그’가 ‘바이델’의 족적을 따라갈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게오르그’는 몽벵뿌 식당에 앉아 어떤 경우든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럼에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자기도 모르게 ‘마리’가 나타났는가 싶어서 돌아본다. 게다가, 기뢰로 인해 세상을 떠난 ‘마리’가 마르세유로 돌아온 환상에 젖어든다. 그리움으로 사랑을 지켜내려는 방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이 임계치로 치닫게 할 것이고, 아마도 ‘게오르그’는 ‘바이델’처럼 생을 마감할 테다. 무엇보다 프랑스 경찰이 아비뇽에서 독일인 망명자 대청소를 끝내고 마르세유에 진입했음에도, 이 상황을 무기력하게 쳐다보는 그의 모습이 씁쓸한 결말을 암시한다.
‘게오르그’는 죽음의 세계에 다다르기 전, 몽벵뚜 식당의 주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트랜짓>에서 미약하게나마 위로의 감정을 느꼈다면, ‘게오르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몽벵뚜 식당 주인과 유관하다. 만약, ‘게오르그’가 본인이 경험한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면, 죽음마저도 잔혹했을 테다. 하지만, 모든 것이 도주 중이고, 지나가 버리는 것에 불과한 통과의 세계에서 통과자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제삼자에게 전하는 행위는 혼령이 되어서도 느낄 고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위령제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내레이터의 존재는 궁극적인 암울함을 없애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레이션을 통해 통과자의 생애가 일종의 기록으로 남고, 이는 끊임없이 비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