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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Jul 15. 2020

그곳에서 우매한 인간들을 보았다, 그리고 희망도 있었다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 (2019)


“이 법칙(열역학 제1 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에너지이며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 무한히 존재하며 한 가지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뀔 뿐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에너지고, 나도 에너지야. 그리고 너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는 영원히 존재하는 거야. 새로운 것으로 형태가 바뀔 뿐이지. 이론적으로 우리 둘의 에너지는 다시 만날 수 있어. 수백만 년이 지난 후에, 그때 어쩌면 너는 감자가 되거나 토마토가 될지 몰라.”


2018년 국내에서 개봉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영화 <더 스퀘어> (2017)는 사각형 형태의 전시물을 매개로 지식인의 위선, 인종차별, 계층차별 등 인간의 어리석은 짓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 수상작인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 (2019)에서도 사각형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다만,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말이다. 로이 안데르손 감독은 화면을 사각형 화폭으로 삼고, 본인 영화의 대표적인 색감인 건조하고 창백한 회색으로 바탕을 칠한다. 그리고 딥 포커스를 맞춘 화면에 에피소드마다 다른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들에게 제한적인 역할과 동선을 부여한다. 이는 영화가 움직이는 인물화와 같으면서도, 지구상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재현함으로써 현실성도 갖추게 만든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군상을 담아낸다. 그렇다면 로이 안데르손 감독이 말하는 군상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사라지지 않고, 과거와 현재 세대 사이를 돌고 도는 끝없는 과오이다. <끝없음에 관하여>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일부 캐릭터는 다른 에피소드에도 등장하고, 일부 에피소드는 청각적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어떤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와 충돌하며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만든다.



영화는 잿빛 하늘을 떠돌아다니는 연인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마르크 샤갈의 작품 「Over the Town」(1913)에서 영감을 받았다. 「Over the Town」 속 연인은 마르크 샤갈 자기 자신과 그의 아내인 벨라 로젠펠트로, 반(反)유대주의와 계층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의 결실을 본 것을 그림으로 승화했다. 마르크 샤갈은 사랑의 색깔만이 인간의 삶과 예술에 의미를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겪은 고난을 회색 계열의 바탕으로 표현하되, 서로 안으며 하늘을 유영하는 연인에 밝은 색깔을 입힘으로써 사랑과 희망이 가득한 미래를 꿈꿨다. 근데, <끝없음에 관하여>가 전반적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존재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회화에서 영감을 받은 오프닝이 엉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연인은 중간에 재등장하고, 엔딩 크레디트 직전에 나오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통해 이 영화의 오프닝은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로이 안데르손은 인류가 저지른 우둔한 짓들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마르크 샤갈의 작품 「Over the Town」을 빌려 인류가 옳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을 품을 수 있음을 말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대다수가 창백하고 무표정의 얼굴을 갖고 있고,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을 쌀쌀하게 대한다. 이들로부터 크게 세 가지의 허물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관계의 단절이다. 극 초반부에 등장하는 소통 관리자인 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상대방을 동정할 줄 모르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배임한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은 가게 앞에 고사한 나무에 물을 주고, 분무기로 시든 잎에 물을 뿌리는 등 죽은 생명에 관심을 두지만, 자신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남성을 무시한다. 관심의 대상이 생(生)이 아닌 죽음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인간관계의 단절을 상징한다. 이뿐만 아니라 기차역에서 부러진 구두 굽 때문에 불편해하는 여성을 도와주기는커녕 염탐만 하는 남성의 에피소드, 길을 잃어 사람을 잘못 본 사람을 차갑게 노려보는 연인의 에피소드 등도 해당 과오를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자본과 결부되어 발생하기도 한다. 사제와 정신과 의사의 에피소드에서 정신과 의사는 신앙심을 잃어 괴로워하는 사제를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의사는 대화 끝에 돈을 언급하며 자본 거래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관계가 쉽게 끊어질 수밖에 없음을 암묵적으로 강조한다. 다양한 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로 획일화되는 경향을 은유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정신과 의사는 고통을 호소하는 사제를 끝내 포기하고, 그로 인해 죄과(罪科)의 순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인간관계가 무너진 현실에 절망하여 처절하게 사랑의 감정을 표출한다. 그러나 다만 잘못된 방식을 취하며 비극을 심화한다. 상점에서 한 남성은 일면식도 없는 여성에게 “두 사람, 할 말이 많은 모양이야!”라고 고함친다. 해당 여성이 무시하자 재차 소리친다. 그럼에도 여성이 어던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남성은 여성의 뺨을 세차게 세 번 때린다. 지금까지 이 상황을 방관하던 사람들은 뒤늦게 남성을 제지하고, 호의적이든 비호의적이든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의 지연된 반응은 인간애를 갈구하는 남성의 내면에 상처를 남긴다.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남성은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라고 묻자, 여성은 마지못해 “그래, 알지”라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진심이 담기지 않는 대답은 남성의 내적 상처를 덧나게 한다. 이런 비극은 다른 에피소드에서 연극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한 남성이 퇴근길 버스에서 본인의 우울함을 옆에 앉은 사람에게 애절하게 드러내지만, 그 사람은 무시한다. 침묵이 흐르던 중 창가에 앉은 사람이 “자기 집에서 슬퍼할 것이지”라고 말하며 비아냥거린다. 어떤 사람이 뒤늦게 이 남성이 버스에서 슬퍼하면 안 되냐고 따지지만, 오히려 타인과의 언쟁을 부추기며 남성의 멜랑콜리를 깊어지게 만든다.



소통 부재는 에피소드 내 인물들 간의 충돌뿐만 아니라 인접한 에피소드들끼리 부딪히며 환기된다. 첫 번째 예시로, 지뢰를 밟고 두 다리를 잃은 남자는 슬픔에 잠긴 채 역사 내에서 서글픈 곡을 연주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일부는 할금할금 살필 뿐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남자가 연주하는 멜로디는 이전 에피소드 말미에서 시작해 가족 간의 단절을 그려내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할머니는 아들과 손주의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로 담지만, 며느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할머니의 프레임에 며느리는 한 번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 주변을 서성거린다. 이렇게 음악으로 묶인 에피소드들은 타인을 향한 관심과 소통이 결여된 사회 분위기를 깊게 살펴본다. 또 다른 예로는, 샴페인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여인의 에피소드와 길 위에서 춤을 추는 세 여자 여행객들의 에피소드가 있다. 두 에피소드 모두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며, 각각 어두운 분위기를 품은 전후 에피소드와 충돌한다. 에피소드 간에 정서적인 대조를 이룸으로써 본인 쾌락에만 집중하고, 타인의 불행을 방치하는 인간세계를 형상화한다.



<끝없음에 관하여>는 믿음과 신뢰를 상실한 사회도 논한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우둔한 남성은 매일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 돈을 보관한다. 어떤 치과 의사는 마취를 거부하는 환자를 설득하지 않고 치료를 시작한다.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자 치과 의사는 뒤늦게라도 마취를 해야 한다고 타일러야 하지만, 오히려 진료를 거부하고 병원을 떠난다. 라포(rapport)가 형성되지 않은 치과 의사와 환자의 에피소드는 관계의 단절을 가리키는 동시에, 신뢰의 소멸을 상징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잃은 사제의 에피소드도 해당 주제에 포함된다. 복음을 전파하는 게 일인 사제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가톨릭을 믿는 신도들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사제는 꿈에서 신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며 믿음을 저버린 것에 대한 벌을 받는다. 정신적으로 무너진 사제는 성혈을 상징하는 포도주를 망각과 회피의 도구로 삼으며 스스로 현실과 유리한다. 그런데 신도들도 신뢰를 상실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화면 속 문 사이로 보이는 신자들은 봉헌될 성체와 성혈을 기다리는데 술에 취한 사제의 비틀거리는 걸음에 동요하지 않는다. 뒤에 앉아 있는 신도들도 상황을 관망할 뿐이다. 이는 이들이 미사에 집중하는지, 그리고 종교적 믿음이 진실한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또한, 종교가 인간 존재와 관련된 가치를 논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신뢰의 가치를 신의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끝없음에 관하여>는 인류의 최대 과오인 욕망 및 야욕을 다룬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한 중년 남성은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들에게 최근에 우연히 본 학창 시절 친구에 관해 이야기한다. 본인이 인사했지만, 학창 시절 때 입은 상처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지나간 친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그 중년 남성이 재등장해 친구 이야기를 이어서 한다. 근데,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절망과 질투심으로 가득 찼다. 학창 시절 본인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박사 학위를 따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폭넓은 사회 경험을 쌓은 반면, 중년 남성은 소시민처럼 지내온 자기 삶에 좌절한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친구의 명예와 성공을 부러워하고, 아내의 위로에 되레 짜증 낸다. 사람마다 성공과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잊고, 그저 타인과 비교하는 일에 눈이 먼 남성은 좌절된 성공 욕구에 정신적으로 무너진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 한 남성은 가족의 명예가 최우선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딸을 살해한다. 욕망에 눈이 먼 자는 어떤 가치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를 망각하고, 죄를 범해 끝없는 벼랑으로 떨어진다. 로이 안데르센 감독은 이를 화면 중앙에서 남성이 피범벅이 된 딸을 안은 채 절규하고, 아들과 아내는 화면 왼쪽의 어두운 공간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는 인물화로 그려낸다.



감독은 욕망과 야욕으로 인한 문제를 시대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영화에서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직전의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장교들이 등장한다. 연합군의 공습을 피해 어디론가 숨은 이들은 술에 몹시 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한다. 표면상으로는 지배와 정복 야욕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던 파시즘의 종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에피소드의 세트를 유심히 살펴보면,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장교들이 있는 공간은 흔들릴지언정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무고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던 야욕과 그로 인한 비극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겠지만, 파시즘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나면 재발될 것임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영화 후반부에 전쟁에 패배한 나치 군인들이 소련군의 감시하에 포로수용소까지 행군한다. 이 또한 파시즘의 몰락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 행군과 눈보라 속 소련군의 삼엄한 감시는 주변 국가를 공산주의로 물들이겠다는 소련의 야욕이자 향후 냉전을 암시한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패권 경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국가 간 상충하는 야욕 때문에 비인륜적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로이 안데르손 감독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전사한 아들의 무덤에 꽃을 심고 물을 주는 노부부처럼, 비를 맞더라도 딸의 신발 끈을 묵묵히 묶어주는 한 아버지처럼, 그리고 기차 플랫폼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에게 뛰어가 포옹하는 남성처럼 멜랑콜리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노력이 끊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단언컨대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의 잘못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만 바뀌어 영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고장 난 차를 포기하지 않고 수리하려는 남자, 그리고 뒤로 펼쳐진 하늘과 맞닿은 길을 통해 극복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조금씩 끝없는 과오를 초극할 수 있을 테다. 이것이 바로 로이 안데르손 감독만의 위로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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