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발견 섹션 상영작
많은 사람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애쓴다. 꿈을 현실로 실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에서 헤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끝날 기미가 없는 여정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건지, 반드시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지 등 본인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울러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력이 소진된 사람은 본인이 사랑하는 대상을 미워하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를 되돌이켜 봤을 때 과연 의미 없고 실패한 삶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미지의 영역에 도달하려고 하루를 버티고, 삶이 계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 자체가 귀중하고 대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발견 섹션에 초청됐던 손모아 감독과 안정연 감독의 공동 연출작 <가만한> (2020)은 이와 같은 실존적인 고민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피아노를 전공한 ‘준서(박수연)’는 공황장애를 앓게 되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잠적했다. 시간이 지난 후 본인이 도망쳐 나온 모교로 복귀했고, 임시 행정 조교 업무를 맡는다. 그런데 그곳에서 과거의 아픔을 상기하는 인물 혹은 사건을 만난다. 손모아 감독과 안정연 감독은 ‘준서’의 트라우마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준서’의 감정을 억지로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않으려고 독백 장면을 아예 쓰지 않는다. 대신 두 감독은 픽스 숏을 고집하고, 각 숏에서 일어나는 음악과 관련한 준서의 내적 충돌에 집중한다. 무엇보다 <가만한>에서 CD 음악, 피아노 선율을 포함한 모든 음악이 ‘준서’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서 역할을 하며 ‘준서’의 인생선을 형상화한다. 또한, 음악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타인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흐름을 생성하는 평균율로서 존재한다. 상영 후에 진행된 온라인 GV에는 정지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손모아 감독, 안정연 감독, 박수연 배우, 그리고 이화연 배우가 참석하였고, 영화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 상영 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측에서 마련한 <가만한> 온라인 GV는 줌(ZOOM)과 카카오톡 오픈채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 연출 의도
정지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이하 정지혜): <가만한>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암울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은 것 같은 고요하고 잔잔한 무드와 서사로 진행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고요한 순간의 연속을 놓치지 않고, 인물의 내면에 생기는 미세한 변화들을 끝까지 가져옴으로써 ‘준서’라는 인물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가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가만한>은 인물의 등 혹은 뒷모습으로 관객에게 얼마나 큰 감흥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먼저 첫 장편 <가만한>을 연출한 손모아 감독님과 안정연 감독님께 어떤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하고 싶으셨는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손모아 감독(이하 손모아): 최근에 읽은 작가의 글이 있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지 딱히 무언가를 이뤄내려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가만한>을 찍을 당시에도 그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우리가 무엇이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 ‘우리가 꼭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걸까?’ 등과 관련된 이유로 사람들이 잠적하잖아요. 근데, ‘우연히 무엇이 되지 않았고, 무엇이 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가만한>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안정연 감독(이하 안정연): 각본을 쓸 무렵이 3년 전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목표 지향적인 계획을 세워서 인생을 조직하는 게 인간이 삶의 불안에 대처하는 본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것이 지나간 자리, 혹은 도달하지 못한 자리에서 매일매일 버티고, 영위하고, 지속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저부터 영화 작업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저희 세대뿐만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2) 각자의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의 소감
정지혜: 박수연 배우님, ‘준서’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큰 파도를 보여주지 않지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미세한 순간들 때문에 고민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준서’는 어떤 인물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리고 ‘준서’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고민하셨던 지점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수연 배우(이하 박수연): 우선, 제가 <가만한>에 참여하면서 ‘준서’를 만나서 좋았어요. 지금까지 20대에는 꿈을 향해 나아갔지만, 30대 초반에 가까워졌을 때 무너지는 시기를 다루는 영화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준서’가 딱 그 시기에 속하는 캐릭터이고, <가만한>이 그런 영화라서 좋았어요.
정지혜: 이화원 배우님, '수미(이화원)'라는 인물을 제안받으셨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화원 배우(이하 이화원): 제게 ‘수미’라는 인물은 공감이 잘 되는 캐릭터였어요. 저는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주변에 피아노를 잘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고, 저는 그들 속에서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학생이었어요. 그러나 1등을 못하는 학생이었어요. 그래서 ‘수미’라는 캐릭터에 공감했어요. 지금은 연기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늦게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다 보니 연기하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수미’에게 다가가는 게 쉬웠어요.
정지혜: 관객들께서 보내주신 질문 중에서 ‘준서’에게서 많은 갈등,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느낌 등을 받았다고 합니다. ‘준서’를 연기하는 데 있어서 이 지점을 어떻게 접근하셨는지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박수연: 영화가 시작할 때쯤에 ‘준서’는 피아노를 가까이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애증의 상태로 출발해요. 그렇게 출발했다는 것은 ‘무엇이 되지 않을까?’,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결론적으로 도달하는 의미를 뜻해요. 극 중 초반에 ‘준서’는 피아노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피아노를 그만큼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피아노를 그만큼 미워하게 되는 상태에 놓여 있어요. 하지만, 점점 피아노를 쳐다보게 되고, 피아노 선율을 듣게 되고, 그러면서 후반부에서는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했음을 확인하게 돼요. 이후 ‘준서’가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 하는 생각으로 연기했습니다.
3) <가만한>의 특징 – 픽스 숏, 기타 이미지
정지혜: 약간 답답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카메라 앵글이 좁았는데, 무엇을 의도하셨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있어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촬영 방식을 택하셨는지 저도 궁금했습니다. 특히, 고정된 카메라로 뒷모습을 담아내는 게 특징적이었는데, 이에 대해 두 감독님께서 이야기를 공유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손모아: 정지된 앵글에 많은 생각이 들어갔어요. 우선, 아무래도 ‘준서’가 가만한 인물이잖아요. 그래서 움직임이 적어요. 이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무언가를 보여주려면 카메라가 움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정지된 상태에서 ‘준서’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여주려고 카메라를 고정했어요. 그리고 대화 숏의 경우 저희가 대부분 픽스 숏으로 촬영했는데, 처음으로 카메라가 움직이는 게 ‘준서’가 유년 시절 피아노 선생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에요. 그 장면의 경우에는 ‘준서’의 마음 상태를 반영했어요. ‘준서’가 선생님을 만난 이후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지점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픽스 숏을 고집했습니다.
정지혜: 말씀해주셨다시피 그 장면과 ‘수미’가 연주하고 있을 때 ‘준서’가 다가가는 장면 등 대표적인 몇 장면에서 발생한 카메라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영장 장면, 연못 장면, 늪 장면 등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 같습니다.
안정연: 일단은 물이 흐르는 이미지와 상대적으로 대비가 되는 늪이나 연못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개념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필요했어요. 저희 영화에서 인물이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감정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인물 이외의 공간이나 상징물들로 인물의 현재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어요. 실제로 각본을 쓰면서 물속에 잠겨 있는 여인이 조금씩 호흡을 해 나가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습을 많이 상상했어요. 그래서 그런 이미지를 핵심 이미지로 설정하고, 편집할 때도 수영장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물 흐름, 호흡과 연관 있는 이미지 등을 고려했어요.
4) 곡 선정 및 의도
정지혜: <가만한>에서 많은 피아노곡들이 삽입되었는데, 곡은 어떤 의도로 선별해서 사용하셨나요?
안정연: 처음에는 좋아하는 곡들 위주로 떠올리다가, 조금씩 기능 또한 고려했습니다. 음악이 분위기로서만 기능하게 되기보다 저희 영화에서 상당 부분 독자적인 역할을 하기를 바랐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에 ‘준서’의 엄마가 틀어놓는 곡의 경우 스카를라티의 곡을 사용했는데, 연습곡 중에 굉장히 규칙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곡을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화원 배우와 논의하면서 실제 졸업 연주회에서 많이 연주되는 곡도 선별했어요. 특히, 이화원 배우와 논의 끝에 고른 곡은 영화 후반부에서 도전적인 기능을 하기를 바랐어요. 저희 영화의 영어 제목이 ‘Well-Tempered’이듯이 인물의 들쑥날쑥했던 마음, 상태 등이 본인만의 방향성을 찾아가면서 조율되어 가는 과정을 평균율적인 상징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바흐의 음악을 중심으로 다른 음악도 활용함으로써 평균율이 지닌 반복성과 변주적인 특징을 이미지로 구상하는 데 적용하려고 시도했어요.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891
* 영화제 소개: https://artlecture.com/project/5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