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은 짧고 추락은 길다.

아노라

by 원 무비 원 월드

인간은 추락할 때 그제야 자신의 위치를 피부로 느낀다. 자신이 속해있던 자리에서 바로 하강할 수도 있지만, 극적인 것에 환장하는 영화의 세계에서 추락은 주로 주인공이 극적인 상승을 한 직후에 일어난다. 현재 가장 핫한 영화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션 베이커의 영화들을 떠올려보면 대부분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아노라>는 그가 만들고 있는 영화들의 플롯의 측면에서는 가장 이질감이 있는 편에 속한다.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밝고(사실 밝다기보다는 쨍한 느낌이지만) 유머러스하긴 하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주인공들이 상승한 적은 별로 없다. 대체로 미적거리지만 계속 일이 안 풀리는 추세로 결말까지 이어지는데, <아노라>의 경우 이례적으로 영화의 1막까지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주인공이 상승한다. 물론 그 상승의 추세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불안함을 감지할 수는 있지만, 영화의 마법에 홀려 한편으로는 ‘션 베이커의 세계에서 행복한 캐릭터가 나올 만도 하지’라는 환상에 빠질 법도 하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 환상은 2막의 시작과 동시에,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반의 ‘아버지’의 저택에 초인종이 울리고부터 와장창 깨진다. 백마 탄 왕자님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노라의 곁에 남은 건 같은 계급의 노동자들 뿐이다. 아노라는 자신의 꿈같은 환상이 줄행랑치는 걸 순순히 믿지 못하고 부정한다. 그녀 코앞에 들이닥친 계급의 저승사자 셋 앞에서 아노라는 연신 자신은 ”이반의 아내“라고 소리치지만, 그리고 심지어 법적인 증거물까지도 있다고 하지만 셋에게 그런 말들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노라가 말한 ”이반의 아내“는 마치 그녀가 그의 연인이라는 의미보다 하나의 지위이자 신분처럼 느껴진다.


다시 <아노라>의 추락 서사로 돌아오기 전에 션 베이커가 다루는 소재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고자 한다. 그가 다루는 인물들은 대체로 성 노동자들인데, 하급 노동자 전체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성 노동자들만 다루는 이유가 뭘까. 노동의 개념을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일을 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급 노동자들이 하는 노동의 형태인 육체노동은 그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인간의 육체가 노동의 수단이 된다. 다시 말하면 션 베이커가 말하고 있는 노동은 육체가 도구가 되는 디스토피아의 톱니바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성 노동이다. 한국어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직종 중에서 성 노동만 유일하게 ‘몸을 판다’는 말을 사용한다. 저 말을 보면 항상 사람의 몸이 사고 팔리는 한낱 물건에 불과하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되새겨주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서글프다.

영화 초반 아노라는 자신의 노동을 자랑스러워한다. 오프닝부터 관객들의 얼굴을 붉히게 하는 수위로 적나라하게 비치는 아노라의 노동 현장을 바라보면 음지에서 벌어지는 느낌보다는 프로페셔널리즘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종사하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없이 자랑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보이는데, 아노라를 비롯한 여성들에게 노동은 남들에겐 없는 각자의 장기다. 영화 초반 한 손님이 아노라에게 묻는다. 그녀의 가족이 그녀가 하는 일을 아냐고. 아노라는 거기에 신경을 일도 안 쓰는 듯 그러는 손님의 가족은 그가 이런 데를 오는 걸 아냐고 맞받아친다. 디스를 유머로 받아칠 여유. 이반을 만나기 전까지 아노라는 여유가 있었다. 이반을 만난 아노라는 그의 씀씀이나 애정표현에도 자신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잃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그녀에게 반한 것처럼 보여도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시간들은 모두 근무시간이다. 아노라는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 선을 꿋꿋이 지킨다.


하지만 이반의 고백을 들은 순간, 그녀의 마음은 흔들린다. 그녀가 속물이어서도 아니고, 잘 속아 넘어가는 백치여서도 아니다. 그녀가 감정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사고판다고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모두 진짜다. 이반의 고백을 받은 이후 사실 그녀의 내면에서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났다. 적성이자 재능처럼 보였던 그녀의 직업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녀가 갑작스레 쟁취한 부와 계급에 비해 자신의 위치가 너무 낮다는 걸 느낀 셈이다. 글 첫머리에서 사람은 추락을 하면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다고 했지만, 사실 상승을 해도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다. 다만, 그것을 무시하고 없던 것인 양 부지런히 애쓰지만 말이다.

토로스가 아노라를 ‘창녀’라고 부르는 장면에서의 아노라의 반응은 오프닝의 여유로운 모습과 대비된다. 그녀는 그녀가 종사하는 산업에 관련된 용어 하나만 말해도 발끈한다. 타인들의 무례한 언행이 이유라기보다는 그녀 스스로가 여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농담으로 넘어갈 수 없다. 자신이 애초에 그 직업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고, 다시 거기로 돌아간다는 건 끝없는 추락을 의미하는 거니까.


2막에서 아노라는 삼인방과 함께 이반을 찾으러 다닌다. 1막이 천국이고, 3막이 지옥이라면 2막은 그 사이인 연옥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 속 연옥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내려가는 계단처럼 느껴진다. 수평과 수직이 난무하여 자유로운 느낌의 1막에 비해 수평적인 구도가 지배적인 2막은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데, 플롯상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아 더 답답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때 요란한 1막과 2막 사이에 인터미션처럼 삽입한 2막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는 마치 상승에는 더없이 짧은 시간이 걸리지만 하강에는 이토록 길고 지루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물리적인 증거처럼 보인다. 상승과 하강에는 같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에 필요한 시간에는 이렇게 차이가 극명하게 난다. 생판 모르던 남자인 이반의 고백을 믿는 데에는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시간이 들지만, 그가 그녀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에는 하루가 필요한 것이다.

<아노라>는 그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비해 꽤 어두운 계층 이야기다. 단순히 경비행기와 이코노미석, 고급 승용차와 싸구려 차의 가시적인 요소들의 비교에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 전체가 좁혀질 수 없는 차가운 계급적 현실을 머금고 있다. 악당처럼 보이는 러시아인 3인방은 사실 아노라의 동료다. 그녀와 같은 계층에 머물고 있는 동지로서 아노라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 끔찍한 현실직시의 시간을 겪고 나면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이고르는 사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미국인의 입장에서) 이상한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아마 2024년에 개봉한 영화들 중 가장 요상한 여운을 남긴 영화일 것이다. 이토록 요란법석 끝에 이렇게나 축 가라앉은 고요라니. 그렇다고 개운하거나 눈물이 나는 여운이 아니라 전혀 작동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로가 이루어지고 나서 영화가 끝이 나면 우선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당혹감이다. 사실상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이고르와 아노라의 귀향이 이렇게 길게 담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퀀스는 사실상 영화의 수미상관이다. 굳이 라스베가스로 가서 귀향이 시작되는 이유는 아노라가 1막에서 겪었던 여정의 역재생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아노라에게 맞는 세상은 이반이 아닌 이고르다. 라스베가스로 경비행기를 타고 왔던 아노라는 이제 시끄러운 아기가 울어 제끼는 이코노미석을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과도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다. 두 장면 모두 아노라가 남성의 몸 위에서 성적인 움직임을 하는 모습이지만, 완전히 반대의 모습을 띤다. 전자가 시끌벅적한 음악과 함께 자신의 관능을 뽐내는 방식으로 보여졌다면, 후자는 그 끔찍한 와이퍼 소리와 부스럭 소리만 남은 적막 속 처참한 현실로 그려진다.


반지를 돌려준 이고르에게 아노라가 줄 수 있는 건 자신의 몸 뿐이다. 호의로 준 반지를 아노라는 그걸 호의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그에 대한 대가로 그녀가 지불할 수 있는 화폐는 자신의 몸 외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위로의 현장의 되어야 할 차 안은 역할 정도로 칼같은 거래의 현장으로 변해버린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끼고 무너진 아노라를 꼭 안고 등을 토닥이는 손은 과연 위로로 작동할까? 맥락과 애정 없는 성관계의 제안을 뿌리치지 않고 홀린 듯 몸을 맡긴 이고르는 과연 아노라로부터 기대하는 것 없이 반지를 챙겼을까? 울음을 터트린 아노라를 안고 토닥이는 그의 손은 과연 위로를 위한걸까 아니면 중단된 섹스를 이어 나갈 빌미일 뿐인걸까? 사실 이고르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위로가 작동할지언정 일시적일 것이고 오히려 그들의 비참함을 재확인시켜주는 쐐기와도 같은 토닥임이다. 괜찮다는 위로가 아니라 당신은 위로가 필요할 정도로 불쌍한 존재라는 선언. 정말 고약하고 찝찝한 엔딩이다. 밖으로는 매정하게 눈발만 날리고 그놈의 뻑뻑한 와이퍼 소리는 도무지 그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