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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송 Dec 02. 2020

사랑이 '별책부록'이 된 시대의 로맨스 드라마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사랑이 별책부록이 된 시대

한때 거의 모든 한국드라마에 로맨스가 필수였던 때가 있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어떤 직업이든 어떤 상황에 놓였든 사랑을 했다. ‘사랑’이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인지라 시청자들은 드라마에 빠져들었고 깊이 공감했다. 그러나 매일 같은 반찬만 먹으면 질리는 법, 계속해서 로맨스물을 접하고 또 접하던 한국시청자들은 어느샌가부터 로맨스라면 물려하기 시작했다. N포 세대, 현실에서 연애도 결혼도 포기하는 젊은 세대들도 많아졌다. 사람들은 이제 TV에서 로맨스보다는 다른 걸 보고 싶어하기 시작했다.

이제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은 사랑보다는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 혹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절대 중심 이야기를 방해해선 안 된다. 사랑은 감칠 나게 입맛을 돋우는 정도로만 있어야 한다. 즉, 요즘 시청자들은 본래 이야기를 해치지 않는 별책부록의 선까지만 로맨스의 존재를 봐준다는 말일테다. 로맨스를 잘 못 녹여낸다면 가혹하리만치 드라마가 이뤄낸 다른 성과마저도 모두 평가절하 되기까지 한다. 거기에다가 <하트시그널>을 필두로 <로맨스패키지>, <썸바디> 등 리얼한 일상 관찰카메라에 스토리텔링까지 등에 업은 연애예능이 득세하게 되었다. 잘 만들어진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대신 실제 우리와 비슷한 일반인들의 좌충우돌 러브스토리에 오히려 더 공감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쉽게 쓰이던 로맨스가 이제는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추기 가장 까다로운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로맨스 장인의 로맨스가 별책부록인 이야기

무엇이 나를 드라마를 업으로까지 삼겠다, 결정적으로 다짐하게 만들었는지 묻는다면 나는 꼭 ‘정현정 작가’의 <로맨스가 필요해>를 꼽곤 했다. 정현정 작가는 <로맨스가 필요해> 시리즈와 <연애의 발견>으로 독특하고 발칙하면서도 현실적인 연애담을 보여주며 수많은 시청자들과 함께 내 마음 또한 사로잡고 말았다. 우리네처럼 완벽하진 않은, 그러나 매력적인 여주인공의 솔직담백한 내레이션은 내게 어떤 내레이션이 좋은 내레이션인지에 관한 하나의 해답이 되기도 했다. 정현정 작가 속 등장인물들은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솔직한 자기 자신의 감정을 따라가 사랑을 하고 이별을 말한다는 것이 정현정 작가의 로맨스 드라마의 강점이었다. ‘로맨스 드라마를 만든다면 정현정 작가처럼’. 나는 그의 드라마처럼 솔직하면서도 세련된 로맨스 드라마를 만들겠단 꿈을 품었다. 그리고, 로맨스가 별책부록인 이 때, 로맨스에 능한 정현정 작가가 다시 돌아왔다. <로맨스는 별책부록>?! 제목부터 <로맨스가 필요해>라고 로맨스를 부르짖던 과거와 어딘가 달라진 느낌을 팍팍 풍기며.          


<손 the guest>에 박일도가 있다면 <로맨스는 별책부록>에는 강병준이 있다

로맨스 하나만으로도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던 로맨스 장인 정현정 작가는 로맨스의 가치가 예전만 하지 못한 요즘에 맞게, 과감하게 로맨스는 별책부록으로 미뤘다. 출판사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하겠다, 제목으로 선언해 로맨스 외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궁금하게 만들었다. 전작들에서는 보통의 로맨스 드라마처럼 삼각관계의 남녀주인공들이 과연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 하며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들었다면 이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는 장르물에서 궁금증을 유발하는 방식을 로맨스 드라마에 끌어왔다. <손 the guest>에서 ‘박일도’란 존재는 1회 시작부터 언급되며 16화 내내 시청자들이 박일도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추리하게 만들어 드라마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수많은 로맨스 드라마를 보며 남녀 주인공의 사랑은 어쨌든 이뤄질 걸 너무 잘 아는 요즘 시청자들에게 <로맨스는 별책부록> 또한 장르물처럼 ‘강병준’이란 미스터리한 키워드를 던져준다. 

로맨스 장르는 두 주인공의 사랑이 이뤄지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만성 고질병을 가지고 있었다. 잘 만들어진 드라마, <사랑의 온도>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주인공이 만남을 시작하자 긴장감은 전보다 확실히 떨어졌다. 부모님의 반대 등으로 일부러 헤어지게 만들었다가 결국 다시 만나게 만들었지만 잘 만들어진 앞부분에 비해 진부해 아쉬운 해결방식이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다른 방식으로 돌파해나간다. 대작가 강병준, 주인공 강단이와 성을 같이 하는 사람, 정말 자의로 절필한 건지 세간의 소문처럼 겨루 출판사에서 숨겨둔 건지 살아는 있는 건지 궁금한 사람, 차은호의 아버지인지 지서준과는 어떤 사이인지 헷갈리는 사람… 계속해서 궁금증이 들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조금씩 미스터리를 해소해주는 방식으로 마치 장르물처럼 드라마에 계속해서 몰입하게 만든다. 장르물처럼 몰입되게, 장르물보다는 가볍게 미스터리한 인물을 더한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끝까지 재미있는 성공한 로맨스물이 되었다.      

    

디테일디테일디테일

정현정 작가는 디테일에도 능하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단역들 모두가 각자 디테일한 개성을 부여받아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위해 들러리로만 쓰이지 않는다. 짝사랑도 찌질 하지만 솔직하게 멋지게 그려진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성장을 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에도 감정이입할 구석이 생기면서 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녀의 드라마에 열광하게 만들었다.

잠깐 등장하는 글귀들도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한 편의 책처럼 매 회 드라마 말미에 ‘꼬리말’이라며 잔잔한 글귀를 삽입했다. 아주 빠르게 읽을 새도 없이 지나가지만 16화 내내 정성이 담긴 꼬리말 글귀를 선보였다. 이는 OTT서비스 등으로 드라마를 보는 요즘 시청자들의 특성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요즘은 일시정지하고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의 글귀도 하나하나 뜯어볼 수 있다. 그냥 지나가는 글귀가 이렇게 감동적인 글귀였다니, 하며 시청자들은 스스로 홍보팀이 되어 인스타그램 등의 SNS로 캡쳐한 글귀를 올리며 입소문을 내며 드라마에 대한 호감도를 표현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반대로 천사 또한 디테일에 있었다. 1분도 되지 않는 작은 장면의 디테일이 드라마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게 되었다. 책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책 만드는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와 아날로그 감성의 글귀는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가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사랑에 빠지듯 로맨스 드라마에서도 디테일은 여느 장르물 만큼이나 중요하다. 작은 호감이 켜켜이 쌓여 드라마 전체를 좋아하게 만드는데 <로맨스는 별책부록> 또한 자잘한 디테일들이 모여 드라마를 호감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로맨스는 별책부록출판사도 별책부록본편은?

아쉬운 점은 로맨스를 별책부록화하겠다고 다짐했더라면 출판사의 이야기, 직업 이야기는 본편이 되어 드라마를 좀더 주도하기를 기대했을 거란 점이다. 출판사에는 주인공 강단이-차은호 커플 외에도 대표-이사 커플, 이혼한 서팀장-봉팀장 커플도 있고 막내신입사원 커플도 있다. 차은호를 짝사랑하던 송해린 대리, 강단이를 짝사랑한 지서준 디자이너까지 포함하면 출판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인물은 각자의 사랑을 한다. 모든 캐릭터들이 각자의 삶과 사랑을 하게 만드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주인공 둘의 로맨스는 별책부록처럼 작게 줄어드는데 대신 남은 자리는 다른 이들의 로맨스로 분량을 채우게 되면서 출판사에서 벌어지는 업의 세계 또한 늘어나지 않게 되는 부작용이 생기고 말았다. 이는 어떤 장르의 시청층의 마음도 완전히 붙잡기는 어렵게 만들 수 있는 아쉬운 지점이다. 로맨스 선호 시청층은 보다 깊어가는 로맨스를 기대할 텐데 주인공 커플은 이를 충족시키기 어렵게 별책부록처럼 짧게 등장한다. 그렇다고 출판사란 곳이 궁금해서 진입한 다른 타입의 시청층 또한 여러 커플의 이야기가 책 만드는 이야기보다 갈수록 점점 더 커져버려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사랑에는 남녀 간의 사랑 외에도 여러 갈래의 사랑이 있다. 출판사에서 주인공 커플 외의 커플은 동료애라는 또 다른 사랑을 보여주는데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조연들이 들러리가 아닌 주체적인 인물로 남으면서도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본편을 좀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완벽한 사람은 매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로맨스는 별책부록>의 주인공 차은호는 너무 완벽한 캐릭터라는 점도 아쉬운 지점이다. 차은호는 모난 곳이 없고 결핍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경력단절에 12살 딸아이를 둔 이혼한 강단이가 고군분투하며 성장해나고 다른 캐릭터들도 각자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며 드라마를 매력 있게 만들지만 차은호는 유일하게 모난 곳 없이 매끈하게 세공되어 있는 캐릭터다. 완벽하고 멋지지만 시청자들이 완전히 주인공에 마음 쓰이게 만들기는 어려워졌다. <로맨스가 필요해2012>에서 남자 주인공 윤석현은 완벽한 왕자님이 아니었다. 윤석현은 속마음을 내보이는 일에는 너무나도 서툰 사람이었고 사람을 외롭게 만들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완벽하지 않아서 시청자들의 깊은 공감을 샀다. 겉으로는 잘나가는 작가였지만 속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랑에 서툰 보통의 사람이라는 점이 시청자들을 울렸다. <로맨스가 필요해2012>에서 신지훈 캐릭터는 이성적으로는 윤석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서글서글한, 차은호처럼 완벽한 1등 남자친구감이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오히려 신지훈보다 윤석현이란 부족함 투성이 캐릭터에 더 열광했다. 감성이 이성을 이겨버린 것이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의 차은호 또한 임에 비해 20년 넘게 짝사랑해온 강단이에게는 유난히 서툴다든지 등 인간미를 강조했더라면 시청자들은 드라마에 공감하며 드라마에 더 큰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차은호가 좀더 인간적으로 보였더라면 동시에 강단이에게 저돌적으로 직진하는 반대편의 지서준이 더 부각되었을 것이다. 시청자들은 정현정 작가 드라마를 보며 항상 느꼈던 딜레마, 매력있는 두 캐릭터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며 드라마에 더욱 빠져들었을 것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로맨스 드라마를 기다린다다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을 원한다.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팍팍해진 현실에서 이제 가장 본능적인 그 사랑이란 걸 가장 먼저 포기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생겨나면서 몇 시간이고 플랫폼에 머물며 몰입하게 만들기 비교적 용이한 장르물이 득세하기도 했다. 마니아들의 전유물이었던 범죄, 좀비, 엑소시즘 등을 소재로 하는 장르 드라마가 점점 대중화되는 것도 몰입의 이유일 것이다. 그 속에서 ‘남의 사랑놀음’, 로맨스로 볼거리도 많아지고 사랑도 안 하는 요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새롭지 않으면 로맨스 드라마는 살아남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그래서 로맨스 드라마는 더 잘 만들어져야 한다. 사랑이 힘들어진 시대에 거기에 로맨스 드라마라면 이골이 날 만큼 많이 접한 시청자들을 붙잡으려면 진부해서는 안 된다.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처럼 웹툰의 탄탄한 서사를 원작으로 하고 현실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큰 공감을 사거나 <로맨스는 별책부록>처럼 출판사란 직업세계 탐방으로 눈을 사로잡고 로맨스는 별미로 맛깔나게 다루는 등 진부하지 않게 로맨스를 그려내야 한다. 아무리 사랑이 뒷전이 시대고 로맨스 드라마가 약해진 시대라지만 사랑은 모두의 본능이기에 <김비서는 왜 그럴까>, <아는 와이프>, 넷플릭스의 로맨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등 몇몇 로맨스는 여전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다던 강병준 작가의 내레이션처럼 나 또한 한 편의 드라마가 세상을 뒤집고 바꿀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에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느냐’는 강병준 작가의 이어지는 말처럼 사랑이 메말라버린 현 시대에 한 편의 로맨틱코미디 드라마가 사람들의 맘속에 꺼져가는 사랑이란 불씨를 살릴 수는 있었으면 한다. 세상은 바꾸지 못하지만 드라마가 그 세상 속에 사는 시청자들의 마음 온도를 올려주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여전히 로맨스 드라마를 원한다. 단, 뻔하지 않은 로맨스 드라마를 원한다. 로맨스 장르가 죽지 않고 진화하여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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