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환자』
컨셉이 후킹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게 되면 설레면서도 두렵다. 기발한 발상을 뒷받침해줄 이야기 전개 능력이 있을지 시작만큼 마무리도 재미있을지 걱정되어서. 소설 『그 환자』의 경우도 같았는데, 이 소설의 발상은 근래 보았던 소설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의료진을 미치거나 자살하게 만든 접근 금지 환자’. 소개 문구 첫 줄에서 나는 이미 매료됐다. 의료진이 더 위험해지는 환자라니! 추리·미스터리·스릴러 장르의 콘텐츠를 많이 봐 온 내게도 무척 후킹한 발상이었다. 읽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혹시 이 발상이 클라이막스이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도 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기우였다. 앉은자리에서 나는 단숨에 이 소설을 읽어나갔고 미스터리의 비밀을 안 채로 작가의 떡밥(?)을 직접 회수하러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이 소설은 도입부부터 무척 흥미롭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 페이지에 “본 원고는 ‘나는 어쩌다 의학을 포기할 뻔했는가’라는 제목으로 웹에 기재되었고 원작자가 필명으로 쓴 데다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내용은 바꿔놓은 바람에 작가의 정체라든가 여타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는 알아내려 해도 알 수가 없었다”라고 적혀있는데, 나는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 도입부가 연상되었다. “This is a true story.”의 자막으로 시작되는 <파고>는 곧이어 “생존자들의 요청으로 이름은 바뀌었으나 나머지는 발생한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건 뻥(!)이다. 그러나 이 농담의 진위를 모른 채 우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속 사건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파고>는 진위가 밝혀졌지만 이 소설의 진실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더 재미있는 도입부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드라마에서 시작할 때부터 이 드라마에 언급된 것들은 모두 허구이며 어쩌다 실제와 맞아떨어지더라도 우연이다 하는 식의 자막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인데(드라마 시작부터 김이 새는 느낌이다. 뒤에 배치하면 안 되나? 싶은데 피치 못할 이유가 있겠지.) 정반대로 이렇게 사실인데? 하며 다소 뻔뻔하게 시작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만나면 흥미도가 무척 상승한다. 독자와 관객들의 몰입감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느낌이랄까. 이 도입부 덕분에 더욱 재미있게 미스터리 속으로 더욱 빠져들 수 있었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그 환자’라고 불리는 미스터리한 환자 ‘조’는 6살에 처음 정신 병원에 입원하여 30년째 수용되어 있는 환자다. 그를 치료했던 의료진들은 거의 다 미치거나 자살했는데 이를 알면서도 혈기왕성한 젊고 유능한 의사이자 이 소설의 화자인 ‘나’가 그 환자를 치료하고 싶어 한다. ‘나’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대체 이 환자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발상이 가장 매력적인 소설임은 틀림없지만 중간부터 무너져내려 결말에서는 헛웃음이 나는 그런 소설은 전혀 아니다. 생각보다 사건이 쉽게 해결되어 가는 듯하다고 방심해서도 안 된다.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이야기는 끊임없이 방향을 틀고 뒤집힌다. 어? 어, 어? 하면서 읽게 되는, 흥미로운 미스터리 소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추리·미스터리·스릴러 장르의 콘텐츠는 스포일러가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스포일러를 알더라도 감독이 구현해낸 화면을 감상하는 데 의미가 있는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소설은 글로 쓰였기 때문에 더욱 스포일러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Daum에서 '그 환자'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에 딱 '그 환자 결말', '그 환자 스포' 두 개가 있다. 발상이 기가 막히니 결말이 궁금해 죽겠는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직접 그 환자의 비밀을 추측도 해보고 의심도 해보며 미스터리 소설의 즐거움을 꼭 누려보시길 바란다. 그래서 결말 스포일러 관련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스포일러는 뺀 채 이야기하자면 20세기 폭스사에서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나는 한국으로 배경을 옮기고 한국적인 요소를 넣어 각색하면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환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결말 부분 때문인데 소설을 읽어본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다.
p.s. 도입부에서 웹에 실제로 기재된 이야기라고 쓰여있었다고 언급했는데 지금 글을 쓰려고 책 정보를 찾아보다 저자 소개란에 본명과 신원도 알려진 바 없다고 쓰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혼란스럽고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