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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Feb 11. 2019

김종관 감독 다시보기 #1: 더 테이블

'삶'이라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감정이라는 소품들

 <더 테이블>은 네 쌍의 인물들이 카페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를 순차적으로 담아낸 구술(口述) 영화다. 인물이 전환돼도 두 인물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건 인물의 전환으로 야기되는 대화의 주제와 양상이다. 뚜렷한 접점이 없는 각기 다른 이들의 이야기는 <더 테이블>의 각 모퉁이에서 서사를 지탱한다. 저마다의 매력으로 영화를 잠식해나가는 네 쌍의 이야기는 자뭇 흥미롭다. 그러나 보다 흥미로운 것은 테이블 위의 소품들이 이들의 대화와 관계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 에스프레소와 맥주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연인이었으나 이별 후, 시간이 흘러 톱스타가 된 유진과 회사원이 된 창석의 재회를 담은 첫 번째 에피소드는 실질적으로 유진에게만 감정적 동화를 허락한다. 연인 시절 자상했던 창석의 모습을 기대하고 재회에 응한 유진에게 창석은 유진과의 연애를 동료들이 믿지 않는다며 인증샷을 요구하는 등의 찌질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재회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질수록 유진의 표정 역시 굳어만 간다. 유진에게만 감정적 동화가 이뤄지는 것은 그래서다. 어떤 인연은 철저한 과거형일 때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유진에게 창석처럼.

 유진은 에스프레소를, 창석은 맥주를 시켰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겨 내용물이 다 보이는 창석의 맥주와 달리, 불투명한 머그잔에 유진의 에스프레소는 그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다. 창석은 찌질한 모습이 뻔하게 드러나는 맥주잔 같은 사람이 돼버렸고, 유진은 그런 창석의 모습에 자신의 마음을 구태여 내비치지 싶지 않아 한다. 관객은 유진이 에스프레소를 실제로 먹는 건지, 멋쩍어서 입술에만 갖다 대는 건지조차 알 수 없다. 그건 창석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창석은 그 이유에 대해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초코 케잌과 같은 찻잔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두 번째 에피소드는 여름이 만연한데 올해 들어 처음 봤다는 이유로 민호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는 경진의 인사말로 시작한다. 두 사람은 과거에 세 번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애당초 계획된 민호의 해외여행으로 연락이 끊겼고 이날은 공백이 꽤나 길었던 그들의 네 번째 만남이다. 경진은 그런 민호가 밉고, 민호는 그런 경진에게 미안하다. 마냥 양가적으로만 보이는 이들의 마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호감이라는 공통된 감정이 전제돼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초코 케익이 놓여 있다. 찻잔만 있었다면 다분히 삭막했을 테이블에 초코 케익은 그 거리감을 해소시켜준다. 민호가 해외 각국에서 경진을 생각하며 사온 선물들이 그녀의 토라진 마음을 녹였듯이. 한편, 그 긴 시간 연락 한 번 없었냐는 질문에 두 사람은 '내가 뭐라고'라고 대답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의 조심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빚어낸 두 사람의 귀여운 오해에서 비롯됐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찻잔 역시 같은 모양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같은 찻잔 그리고 하나의 초코 케잌'으로 요약된다.


세 번째 에피소드. 같은 라떼 그리고 닮은 마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세 번째 에피소드는 어떤 에피소드보다도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오래전에 부모를 잃은 은희는 결혼을 위해 어머니를 연기해줄 사람(숙희)을 소개받는다. 이들의 대화는 매정하리만큼 사무적으로 시작한다. 은희가 연기해야 할 내용들을 알려주면 숙희는 받아 적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대화가 전개되면서 두 사람은 자신의 감정적 허점을 상대방에게 드러내고 만다. 은희는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 자신을 '거북이'라 불렀다며 그리움을, 숙희는 죽은 딸도 결혼식을 치렀었는데 자신의 잘못으로 가지 못한 게 후회된다며 미안함을 드러낸다.

 은희와 숙희는 몇 마디 대화 없이 서로의 감정에 깊이 공명한다. 두 사람은 같은 라떼를 시켰다. 머그잔도, 그 안에 담긴 내용물도 같다. 두 사람은 사기라고도 볼 수 있는 이 행각에 아무렇지 않게 임한다는 점에서 마음의 외향이 닮아 있는 편인데 한편으로는 소중한 사람에 대한 상실을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마음의 내향 역시, 닮아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같은 두 사람이 만나서였을까. 자리를 뜨기 전 은희를 거북이라고 부르는 숙희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그런 숙희를 바라보는 은희의 서글픈 눈빛은 하나로 이어진다.


네 번째 에피소드. 꽃잎 그리고 홍차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마지막 에피소드는 시작과 동시에 테이블 위의 소품들이 하나의 미장센으로 작용한다. 물컵 안에 든 꽃(기억)을 꺼내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는(정리) 운철과 그런 그를 나무라며 꽃잎들을 그러모아 물컵 안으로 넣는(미련) 혜경. 운철은 "그래 봤자. 꽃이잖아"라며 중얼거린다. 아무리 아름다웠다고 한들 지나버린 기억일 뿐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결혼을 앞둔 혜경과 그녀의 연인이었던 운철의 이야기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과거형이지만 마음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혜경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운철에게 자신과 바람을 피우자고 말한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 굳이 꽃잎을 그러모아 물컵 안으로 넣던 혜경의 모습은 그렇게 오버랩된다. 그녀가 주문한 음료가 찻잎을 우려낸 홍차라는 것 역시 그렇다. 하지만 운철은 거절함으로써 미련에 우려진 혜경과는 다른 선택을 내린다. 혜경도 끝내 수긍한다.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고하며 수다스러웠던 영화를 끝맺는다. 얼핏 보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첫 번째 에피소드와 닮은 듯하지만 인물들이 서로에게 솔직했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정식 연재: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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