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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Mar 30. 2019

우리(US)라는 역설 <어스>

조던 필 감독의 화두는 언제나 끝에 드러난다

 <겟 아웃>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조던 필 감독이 <어스>로 돌아왔다. 장르 부문에 있어 <어스>는 <겟 아웃>이 그랬듯이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를 포괄하는 복합장르를 고수한다. 그러나 장르를 풀이해나가는 스타일에 있어서는 상반된 노선을 취한다. <겟 아웃>이 인종차별이라는 단일한 주제의식을 다소 정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갔다면 <어스>는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추상적인 주제의식을 굉장히 동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간다. 그러니까 같은 장르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두 영화는 주제의식의 명징성과 서사풀이의 활동성에서 일종의 분화를 이루는 셈이다.     

 '미국 전역에는 무수히 많은 수의 지하 터널들이 서로 이어진 상태로 존재한다'는 오프닝 시퀀스 속 자막이 함의하듯 <어스>는 지상과 (지상에 대비되는)지하의 대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떠한 존재 혹은 개념을 대입해도 이 대립항은 성립한다. '선진국의 국민과 개발도상국의 국민', '귀족과 노예', '의식과 무의식'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 대립항의 핵심에는 행복(돈, 안락함)에는 총량이 있어 한 집단이 행복을 누리면 다른 집단은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냉정한 수학적 전제가 있다. 그러나 두 집단의 대립은 결코 평등하지 못하다. 지상과 지하라는 고도의 차이가 말해주듯 두 집단의 관계는 다분히 위계적이다.      

   

대립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애들레이드와 게이브가 꾸린 가정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단란한 미국 중산층의 표본으로 묘사된다. 딸 조라와 아들 제이슨은 그들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조던 필 감독은 이들 가족의 평범하면서도 단란한 일상을 보여주는데 30분가량의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이는 지상 가족과 지하 가족의 대립항을 보다 극명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적 장치가 된다. 이에 더해 조던 필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 내내 숫자 11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지상과 지하의 관계를 계속해서 상기하게 만든다. <어스>에 부제를 달아야 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11일지도 모른다.

 1이 나란히 마주 보는 형태로 존재하는 11은 '일치'와 '대립'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모순적인 숫자이기도 할 것이다. 조던 필 감독은 11이 갖는 추상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의미를 '11시 11분', '(예레미야) 11장 11절'과 같이 11을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서로를 마주 보게 함으로써 더욱 강화시킨다. 대립항에 대입한 것이 무엇이 됐든 지상과 지하가 띄고 있는 꼴 자체는 일치한다. 그러나 존재에 있어 상대의 부정이 곧, 자기 자신이 된다는 점에서는 필연적인 대립 관계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11의 아이러니는 곧, 대립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붕괴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일련의 과정과 장치들 속에서 관객은 조던 필 감독이 대립항 사이의 간극을 점차 벌려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과 지하의 애들레이드 가족이 혈투를 벌이는 시퀀스에서 관객의 확신은 기정사실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을 죽이고 그들의 삶을 차지하려는 지하의 애들레이드 가족은 '가해자', '악'과 같은 명확한 개념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이 살기 위해 지하의 애들레이드 가족을 죽이는 과정에서 자기방어의 목적을 벗어나 그 잔혹함을 즐기는 것처럼 비칠 때, 그 확신에는 균열이 생긴다. 조던 필 감독의 화두는 그제야 던져진다.

 관객이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은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일 확률이 높다. 그것은 영화의 시점이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관객들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지하보다는 지상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관객들이 '어스(우리)'라는 범주에 허용하는 대상은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이며 허용하지 않는 대상은 지하의 애들레이드 가족이 된다. 그러나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은 관객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폭력에 무뎌지고 절친한 친구의 가족의 사체 앞에서 농담을 하는 등 비윤리적으로 추락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우리라고 믿었던 집단은 영화의 구조 속에서 그 정당성을 철저히 해체당한다.


재건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따라서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과 지하의 애들레이드 가족의 충돌은 물리적 접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지상의 사람들과 지하의 사람들의 대립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하나의 틈새를 만들어 그 대립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가깝다. 지상의 애들레이드 가족이 종래에는 온몸이 피로 물들어 지하의 애들레이드 가족이 입었던 점프슈트와 비슷한 붉은색을 띠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다이나믹듀오의 노래 제목처럼 (우리 모두가 사실은) '거기서 거기'라고만 결론짓는 것은 지극히 안일한 시도일 것이다. 해체된 우리라는 구조 속에서 보다 능동적인 결론을 재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이념과 인종 혹은 출신에 따라 '우리'와 '우리 아닌 자'로 분류하고 우리 아닌 자들에게는 대립의 간극을 넓히는 일이 여전히 이뤄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세상 속에서 '한 인간을 그러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온전히 끝을 내지 않고 여전히 혼란 속에서 마무리되는 이유는 세상이 아직 위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겟 아웃>에서와 마찬가지로 조던 필 감독의 화두는 언제나 말미에 던져진다. 화두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의 생각을 붙잡아 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봐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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