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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Jan 26. 2019

신이 버린 곳에 남겨진  아이들의 이야기 <가버나움>

영화는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는가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제목: 가버나움(Capernaum)

감독: 나딘 라바키

출연: 자인 알 라피아(자인 役), 요르다노스 쉬페라우(라힐 役), 나딘 라바키(나딘 役)

#2시간 6분 #아동 인권 #아트버스터 #어른아이 #가슴 먹먹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인과관계를 통한 일종의 진실(비극) 찾기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시정돼야 한다. 삶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더 참혹한 비극'이라고. 우리는 이따금씩 뉴스와 해외 영상을 통해 중동국가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비극을 접한다. <가버나움>은 그들이 처한 비극을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가까이서 보여준다.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더 참혹한 비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총체적 난국의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가버나움>은 신이 버린 곳에 남겨진 아이들의 이야기다.

 <가버나움>은 주인공 '자인'이 부모를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로 고발해 법정에 세우는 씬으로 서사의 운을 뗀다. 또한 자인은 이미 누군가를 칼로 찔러 수감 중인 상태. 자인의 구체적 고발 동기와 상해 동기는 장대한 회상 씬을 통해 서사의 말미에 밝혀진다. 영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과관계로 이뤄진 셈이다. 그 인과관계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으리라고 지레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인의 시선과 일체화될수록 체감되는 절망감과 무력감은 점진적으로 예상 범위를 초과하기 시작했다.

 


'유령소년' 자인이 벌어지는 비극에서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자인의 부모는 그의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의 생일, 나이조차도 알지 못한다. 자인은 이 세계에서 유령이다. 단순히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자식을 생계의 수단으로 취급하는 부모의 직간접적인 학대 속에서 세상과 철저하게 격려되기 때문이다.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때, 자인은 물건을 팔고 짐을 옮긴다. 자인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바라보고, 걸어가는 것뿐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타자화된 유령소년의 외로운 동선은 관객을 어디로 인도하는 걸까.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보다 끔찍한 건 사랑하는 사람이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인은 부모가 여동생 '사하르'를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이 일하는 가게의 사장과 결혼시키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인의 고함과 절규는 유령의 것과 같아서 이 비극적인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자인의 분노와 절망은 고스란히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전이된다. 영화에서의 사건이 언젠가 접한 적 있는 현실의 사건과 접점을 이룰 때, 울분은 감상의 영역을 넘어 성찰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세상 모든 아이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권리가 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자인은 집을 떠난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유령으로 남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정처 없이 떠돌던 자인은 위조 신분증으로 불법 체류 중인 에티오피아 난민 '라힐'을 만난다. 라힐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 '요나스'와 함께 산다. 요나스는 그녀에게 세상의 전부다. 라힐은 요나스를 낳으면 법적으로 허가된 직장으로부터 쫓겨나 불법 체류자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요나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요나스를 위해서 고된 삶 속에서 매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간다.

 눈여겨볼 점은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이를 팔아넘겼던 자인의 부모와는 대조적으로 라힐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 불행을 감수한다는 설정이다. 자인은 그런 라힐 - 요나스 모자와 함께 살며 그의 부모와 살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정서적 행복을 경험한다. 이와 같은 극명한 대조는 물질적 안정과는 별개로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해보게 한다. 세상 모든 아이는 사랑받으며 자랄 권리가 있다. 아이를 유령으로 만드는 것은 경제적 한계만이 아니다.  


자인의 삶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하지만 신은 그걸 바라지 않아요.

(나와 같은 아이들이) 땅바닥에 짓밟히길 바라죠"     


 유령소년 자인의 동선은 관객을 참혹한 사실 앞으로 인도한다. 자인이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위해 부모가 있는 집에 들렀을 때, 사하르가 임신으로 사망한 정황을 알게 되고 분노에 차 자신의 사장을 칼로 찔렀던 것. 이 유령소년은 부당한 현실을 칼로 찢어버리고 범법자가 되고 나서야 '유령 아닌 것'이 됐다. 그러나 이는 비극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스크린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투영하는 비참한 현실은 무신론자에게도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가버나움(Capernaum)은 성서에서 언급된 지명으로 본래 예수의 축복이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탐욕과 파렴치함으로 인해 예수가 멸망을 예언한 마을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탐욕과 파렴치함에 왜 아이들이 희생돼야 하는가. 우리가 <가버나움>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정부로부터, 부모로부터 방치된 아이들이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영화의 끝까지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자인의 어머니는 자인에게 새 여동생을 임신했다며 '사하르'라고 부르겠다고 말한다.    


<가버나움> 리뷰 잘 읽으셨나요. 아이들이 충분히 사랑받고 자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이번 리뷰를 마침니다. 좋아요와 계정 구독 해주시면 다음에 더 좋은 영화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식 연재: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4818


그리고 묶어 보면 좋을 작품: https://brunch.co.kr/@inu-ssw/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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