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상의 모든 그리움을 담다
영화 <아비정전>은 그리움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제작된 90년대의 감성과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약간의 투박함과 어색함이 보이지만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그리움의 정서는 시간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고 관객들에게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인 ‘아비’는 영화의 정서가 충실하게 반영된 인물이다. 아비는 입양아로 살아오며 끝없이 친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양어머니는 친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피했고 아비는 그에 대한 반항심으로 방탕한 삶을 살게 된다.
양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그녀에게 상처를 준 남자를 찾아가 죽도록 패는 장면이 있다. 아비에게 양어머니는 친어머니와의 만남을 방해하는 존재이면서 그가 지금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어머니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하나지만 그의 삶 속에서 전혀 다른 두 존재로 등장하며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리움을 가중시키는 사람과 그리움을 차단하려는 사람. 양어머니는 아비가 친어머니에게 떠나가 자신에게 그리움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사실이 무서운 것이다. 그리움이 함축하고 있는 다른 의미는 대상과의 이별이다.
하지만 아비에 대한 설정은 유치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아이가 주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시끄럽게 우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비는 끊임없이 여자들을 유혹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그에게 여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달래 줄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극 중에는 ‘수리진’과 ‘루루’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아비는 그녀들이 자신의 삶에 개입하려 했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이별을 고한다. 아비를 괴롭히는 어머니의 존재처럼 그녀들에게 아비는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짧은 시간 나마, 함께 시작한 사랑이었지만 슬픔은 온전히 그녀들의 몫이 됐다. 영화는 그녀들이 아비를 그리워하며 측은하고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주의 깊게 담았다. 그 과정에서 감독은 비가 내리는 연출을 더함으로써 그리움의 정서를 배경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수리진과 루루가 아비를 그리워하는 장면들에서는 대부분 세차게 비가 내렸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관객들은 하염없이 비를 맞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수많은 노력에도 씻기지 않는 그리움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움의 정서는 두 여자를 떠나 그녀들을 사랑했던 두 남자에게 번진다. 아비의 동네를 순찰하던 경관은 수리진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전화하겠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몇 날 며칠을 공중전화 앞에서 밤을 지새운다. 루루를 사랑했던 아비의 친구는 아비를 찾기 위해 떠난 그녀에게 모든 돈을 건네주고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들은 그녀들이 그랬듯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것이다. 영화는 잔인하게도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들이 흐르고 흘러 그리움의 바다에서 조우하게 했다.
양어머니는 결국 아비에게 친어머니가 있는 곳을 아비에게 알려준다. 중국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떠난 아비. 하지만 친어머니와의 만남은 아비가 그리워했던 시간만큼 아름답게 이뤄지지는 않는다. 아비의 친어머니는 아들이 집 앞까지 찾아왔음에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기 위해 일순간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그는 친어머니에게 부정당하면서 삶의 목적을 상실했다. 결국, 허무함에 몸서리치던 아비는 필리핀의 마약조직에게 원한을 사 행선지도 모르는 기차 안에서 총에 맞아 죽게 된다.
“발 없는 새가 있었다. 날아가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고는 했다.
그 새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아 있을 때가 있는데 바로 자신이 죽을 때였다”
발 없는 새는 아비 그 자신이었다. 발 없는 새를 날 수 있게 했던 힘은 아비가 한평생 괴로워했던 그리움이었다. 아비에게 삶과 그리움은 불가분의 관계였고, 살아있음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그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그리움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은 그가 삶을 끝내는 순간이다. 영화는 해피엔딩을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움의 향을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아비정전>은 그리움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아비의 비행을 보여주며 영화 안에 그리움을 가득 담아냈다.
그리움으로 무너지는 것은 조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비를 사랑했던 소여진과 루루, 그녀들을 사랑했던 경찰관과 아비의 친구. 어느 누구의 그리움도 해소되지 않았다. 짧은 시간 세차게 내리는 장마철의 비처럼 그리움은 사랑을 빙자해 우리를 흠뻑 젖게 한다. 비극은 영화처럼 비는 그쳐도 그리움은 쉽사리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친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비처럼 그리움은 맹목적이고 강렬하다. 어머니에 대한, 아들에 대한, 연인에 대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이렇게 영화 속에서 발 없는 새처럼 정처 없이 떠다닌다. 한 맺힌 그리움은 잊히지 않고 죽어서야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