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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토 Apr 26. 2024

<여행자의 필요>에 대한 소고 - 영화에 대한 영화

 





 나는 지금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야식으로는 김치찌개를 먹었다.

 <여행자의 필요>의 화두를 하나 꼽아보자면 나는 ‘언어’를 뽑겠다. 외국어가 어려운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다음과 같다. “나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 프랑스어 교수법은 ‘햄버거 하나 주세요.’ ‘혹은 우체국이 어디 있나요?’ 같은 말과 다른, 진짜 자신이 느끼는 걸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서지요.” 즉 홍상수에게 외국어가 어려운 이유는 진심을 전달하기 힘든 매체media이기 때문이다. 이 매체는 사건만을 전달 가능하다. 이 매체는 사건이나 현상 안에 있는 정서를 전달하기 힘든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과연 낯선 언어로 누군가와 대화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그리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정서emotion는 번역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정보information로 변환되고, 대화는 더 이상 의사소통이 아닌 의사전달의 과정으로 전락해버린다.

 다만 홍상수의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은 듯하다. 과연 외국어가 그렇고 한국어는 그렇지 않은가? 도통 한 마디 단어조차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과 진심이 가득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까운 가족과도 한 마디 말이 안 통하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애초에 언어가 정서를 끌어내는 것에 유용한 매체이기는 한가? 모국어는 오히려 너무 스스로에게 익숙해 그 뜻을 퇴색시키기도 한다. 모국어는 상투적이다. 모국어는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진짜 의미와 정서를 퇴색시키고 불능시킨다. 모국어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말이 하나의 습관이다. 그냥 항상 그랬으니까. 아무런 사유도 없고 관찰도 없이 저것은 아름다운 것. 즉 꽃은 아름답다. 이것은 행복한 기분. 즉 나는 행복하다. 그런 발화는 심지어 자기기만적이다. 습관적으로 말하고―그 후에 습관적으로 느낌을 가진다. 모국어로도 정서를 기술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인 우리는 어찌하면 좋은가?

 몇몇 등장인물은 상투성을 두 가지 측면에서 극복한다. 외국어의 사용과 악기의 사용이다. 익숙한 외국어인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은 말을 ‘고른다’.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지, 어떤 정서가 내 말을 촉발하는지 들여다본다. 또 그들은 악기를 연주한다. 그런데 여기, 악기 연주에서는 앞의 사례와 다르게 흥미로운 역전 관계가 성립한다. 정서를 언어로 표현하는 언어의 방식 대신, 연주자는 연주함으로써 정서를 촉발한다. 즉 연주가 정서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멜로디가 먼저 있고 멜로디가 정서를 촉발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놀랍게도 언어에서도 가능하다. 의미는 있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 그 언어가 먼저 있고 정서는 뒤늦게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양식을 시poem라고 한다. 시는 소설과 다르게 설명하지 않는다. 몇 가지 특질적인 사례를 제외한다면 시인은 상투적인 언어와 다르게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일상의 세계에 균열을 내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그렇지만 시는 이미 생명력을 잃었다. 아름다운 것은 항상 요절한다. 아름다운 언어는 금세 상투적으로 변한다. 그것은 각인되고 소비되며 한때 시였던 것으로 남는다. 어느 순간 시 또한 연주 기술처럼 ‘뽐내는’ 틀이 된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번역이다. 어떤 언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단지 움직임으로서의 언어만이 진정한 의미로 운동할 수 있다. 프랑스어로 실시간 번역되는 윤동주의 시처럼 항상 모든 것은 A에서 B로 이동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필요로서의 정언명령이다. A나 B 지점에 머무르고 있는 언어는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언어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리고―당연하게도―이 움직임에 가장 적합한 새 시대의 언어는 영화-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영화 이미지는 모두에게 모국어이면서 동시에 외국어로 작용한다. 비약하자면 이자벨 위페르는 영화이다. 그녀에게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이 항상 기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 이미지는 항상 카메라를 통한 번역을 촉구한다. 이미지는 항상 무국적 상태에 있다. 이미지는 항상 해석을 거부하고 소멸을 향해 운동한다. 이미지는 명확한 것이지만 항상 의미의 불명확 상태에 놓여있다. 이 영화-이미지는 항상 죽음을 기억한다(memento mori). 그것은 이미 사라진 형상을 포착한 것이고 곧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만이 죽음을 기억한다. 이것은 ‘진지’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메타시네마적 영화이다. 일상 언어의 상투성을 극복하기 위해 여행자가 필요하다. 그 여행자의 이름은 바로 영화이다. 막걸리를 마시며 이 글을 쓴 건 형식적인 측면, 메타적인 글쓰기이다. 더 서술할 내용이 있으나 취기가 너무 올라 적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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