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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영 Nov 24. 2017

삼인행

종횡무진 내달리는 장르의 달인.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두기봉은 현존하는 홍콩 느와르의 마지막(혹은 마지막 일수도 있는)세대이다. 졸작과 걸작을 넘나들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간 두기봉은 실패의 모험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이 있듯 어머니가 없다면 자식조차 만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두기봉에게는 실패가 중요하지 않다. 실패는 남들이 부르는 허울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듯 보인다. 이번 작품 '삼인행' 역시 아슬아슬한 작품이다. 두기봉 특유의 관습이 머물고 있긴 하지만 그 관습이 마냥 나쁘게 보이진 않는다. 종종 두기봉의 영화는 관습이 중요한 정서이자 핵심이기도 했으니까. '삼인행'은 남들이 보기에 실패한 작품일까 성공한 작품일까.



과잉진압으로 용의자의 머리에 상해를 입히고 공범들까지 놓치고 만 '첸', 머리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수술을 거부하고 경찰들과 마치 이상한 게임이라도 하려는 듯한 '슌', 자신의 과신으로 여러차례 의료사고를 일으켜 다시 한번 실력을 입증해야하는 '통'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긴장감을 쥔채 극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영화는 거의 병원 밖을 나가지 않는다. 생(生)과 사(死)가 공존하는 병원이라는 공간은 아이러니 하면서도 극적인 장치에 아주 좋은 무대이다. 세 사람 뿐만 아니라 병원에 있는 모두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다. 두기봉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를 이 죽음의 무대에서 인간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88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인물에 대한 정보와 사연은 거의 없다. 경찰은 어떻게하다 범인을 쏘고 조직내에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용의자는 어떤 사건으로 어떻게 하다 경찰에게 쫒기고 있으며 경찰들과 왜 이런 실랑이를 하고 있는지 등 캐릭터에 대한 정보와 설명이 거의 없다. 중요한 것은 사연설명이 아니다. 병원이라는 공간안에 놓인 이 세사람이 어떻게 상호작용 되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켜 결국 어떠한 종극으로 펼쳐지는지가 중요한 영화이다.


두기봉의 초창기 작품들은 습작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중반 부터 였으니까. 그전까지는 오우삼이나 서극이라는 거대한 감독들을 곁눈질 삼아 여러번의 실패와 경험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감독이다. 그 자양분들은 자신의 독창적인 정서와 스타일을 만들어 내었고 그 강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때가 느와르(혹은 액션)를 만들때이다.


두기봉의 작품에서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대개 느와르의 특성상 스타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간 자체가 중요해질수 밖에 없다. '미션'에서의 백화점 액션 시퀀스, '대사건'에서는 넓은 공간에서 좁은 공간으로 서서히 포위해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가 중요해졌던 아파트라는 공간, '익사일'에서는 오프닝 액션부터 엔딩에서의 호텔 시퀀스까지 매장면이 액션의 명장면으로 남았던 것, 그리고 '흑사회' 시리즈에서도 '마약전쟁'에서도 '스패로우'에서도 '탈명금'에서도 전부 두기봉의 영화들은 공간이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오우삼과 서극을 카피하며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했던 두기봉은 '익사일'에서 그 빛을 발한다.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와 오우삼의 트레이드 마크 슬로우 모션의 흥미로운 조합처럼 보였는데, '삼인행'에서도 빛나는 종반 액션 시퀀스가 나오게 된다. 무협지나 무협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자태는 우아한 왈츠의 군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종반 액션 시퀀스는 그 모든 혼돈의 카오스가 뒤범벅 되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놓인 인간의 지옥도가 아이러니하게 묘사되고 있다.(수술실패로 마비가 왔던 청년은 극 종반 아이러니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수입하는 과정에서 부제로 넣은 '생존게임'이라는 말은 반반의 감정이 섞여있다. 워낙 설명이 부족한 영화에 일부러 '생존게임'이라는 부제를 넣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의 궁금증과 극의 전개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 있는 반면 영화 자체를 너무 게임으로만 보려고 하는 수입사의 안일한 생각이 같이 든다. 사실, '생존게임'이라는 부제를 넣음으로써 영화가 더 쉽게 이해가 된다거나 극의 포인트로 다가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물론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영화의 부제들도 있다). 어찌보면 삶 자체가 지옥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게임을 펼치고 있다는 생각은 개인적으로 들지 않는다.



부제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은 이유는 관객들이 지나치게 영화를 오독하거나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해석은 각자(관객)의 몫이긴 하지만 중요한 지점들을 놓치고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부제를 적을려면 신중하게 적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비단, 삼인행의 문제만이 아니다). 예전에도 '지옥의 묵시록'이나 '죽은 시인의 사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전부 오역이기도 하니까(아이러니 하게 오역임에도 저 3개의 영화제목은 영화와 잘 맞다). 원제에 부제가 적혀 있거나 아니면 부제를 영화와 맞게 제대로 썼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다시 돌아와, 의사로서 환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선서한 '제네바 선언'을 사람을 죽이는 범인이 읊고 있을 때의 '통'은 이상한 감각을 느낀다. 자신의 과오로 환자들을 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이 살인자를 살려야 한다는 생의 역설은 소용돌이 치는 우연의 감각이다. 이 우연의 감각은 용의자의 행동모토와도 맞닿아 있다. 계획대로 범인을 옮기려고 할때 옮기지 못하고, 자신의 발앞에 열쇠가 떨어지며, 극 종반 중요한 순간 발작을 일으키는 용의자 '슌'은 어찌보면 병원 안을 우연이라는 생의 감각이 소용돌이를 치며 휘감고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종횡무진 내달리는 이 장르의 달인은 결국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찌하랴 두기봉은 실패에 민감하지 않다. 오히려 다음 작품의 자양분으로 삼아 어떤 무시무시한 작품이 나올지 모른다. 혹자 두기봉의 최고작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흑사회' 시리즈를 꼽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도 '흑사회' 시리즈가 두기봉의 최고 걸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삼인행'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두기봉의)느와르는 정서와 폼이 유독 중요하다. '삼인행'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언제나 두기봉 작품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인간들이었다. 느와르의 외피가 많은 영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단 장르 때문만은 아니다.


걸작보다 졸작이 더 많음에도 팬들이 두기봉의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무시무시한 에너지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졸작이 연이어 나와도 두기봉을 기다리게 하는 힘이다. 홍콩 느와르의 마지막 세대, 마지막 자존심인 두기봉은 이제 오우삼과 서극과는 다른 길을 걸으며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고 지금도 나아가고 있다. '삼인행'의 액션은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지만 이 맛을 아는 자들은 두기봉의 작품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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