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제도의 빛과 그림자
“요즘 애들 너무 힘들다, 맨날 시험 공부만 하잖아.”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과거(科擧)라는 시험이 있었던 그 시절에도,
누군가는 밤을 새워 글을 외우고, 가슴을 졸이며 ‘발표일’을 기다렸을 테니까요.
조선의 과거제도는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만든 공식 등용문이었죠.
정기시험인 문과, 무과, 그리고 특정 직능을 뽑는 잡과가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꿈은 단연 문과 급제, 곧 벼슬길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도가 태동한 본래의 이상은,
점차 시간이 갈수록 사회적 계층 고착과 과잉경쟁의 그늘을 만들게 됩니다.
문과 급제를 하려면 최소 3단계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초시 (지방 단위)
복시 (중앙에서 시행)
전시 (왕 앞에서 보는 마지막 시험)
전시는 왕이 주제를 정하고 시험장에 직접 앉기도 했죠.
시험 범위는 경전, 시문, 정책 논술, 역사 등 수백 편.
암기만으로는 부족했고, 정답이 없는 문제도 많았습니다.
가문이 없는 자에게는 거의 유일한 신분 상승의 사다리였지만,
그 사다리는 너무 높았고, 무너지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학원과 비슷한 공간이 조선에도 존재했습니다.
바로 서당, 서원, 그리고 사숙(私塾) 같은 사적 교육기관이죠.
여기서 양반 자제들은 논어, 맹자, 시경 등을 달달 외우며, 글짓기와 답안을 연습했습니다.
게다가 문과 급제자들 중 상당수는 이미 지방 향반(鄕班),
즉 지역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경제력 + 교육 자원 + 인맥 삼박자가 작동되던 구조였습니다.
'금수저만 붙는 시험'이라는 비판은 이미 조선 후기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과거제도가 완벽한 제도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시험을 통해 출신보다는 능력이 강조되던 시대가 열린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장영실, 정약용, 박제가 같은 인물들은
비록 과거 급제가 아니더라도, 실력과 학문으로 이름을 남긴 이들이죠.
즉, 조선은 시험이라는 틀 속에서도 ‘인재 발굴’이라는 가능성을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조선의 과거제도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글을 배우는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시험이 인생을 바꾼다’는 지나친 기대는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도 무거운 짐이 되어 있진 않을까요?
입시는 시대마다 방식은 달라도,
결국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시험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건 조선도, 지금도, 같은 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