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사람들은 새 글자를 두려워했을까?
“훈민정음은 모두가 환영했을까?”
우리는 지금 당연하게 한글을 쓰고 살아갑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한국사에서 빛나는 위대한 사건으로 자리 잡았고,
그 위업을 기리기 위해 매년 ‘한글날’도 기념하죠.
하지만 1443년, 이 새 문자 체계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이들이 박수치며 반겼던 것은 아닙니다.
훈민정음은 그 당시 강한 반대와 비판에 부딪혔던 개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어떤 이들은 ‘백성을 위한 문자’를 반대했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차분히 풀어보려 합니다.
훈민정음을 가장 강하게 반대한 세력은 다름 아닌 지식인 관료 집단, 특히 성리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자학이라는 유교 철학을 신봉했고, 문자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중국의 한자는 오랜 역사와 철학적 체계를 담고 있었고,
그 글자를 사용하는 것은 곧 문명의 중심에 서 있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로 만든 글자를 ‘백성’에게 쓰게 하겠다고요?
그들에게 훈민정음은 중화 질서를 흔드는 위험한 시도,
심지어 야만적인 제도처럼 보였던 겁니다.
훈민정음은 말 그대로 누구나 배워 쓸 수 있도록 만든 문자입니다.
그 단순함과 과학성은 오히려 당시 양반 계층에게 두려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글을 안다는 것’은 곧 권력과 지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만이 시험을 보고, 관직에 오르고, 법과 제도를 이해할 수 있었죠.
하지만 훈민정음이 널리 퍼지면?
그동안 ‘문자’라는 높은 벽 너머에 있던 백성들도
이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지식은 더 이상 독점되지 않게 되죠.
결국 일부 사대부는 이렇게 우려했습니다.
“글이 쉬워지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기는 사대 외교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명의 질서를 존중하며, 한자 문화권 안에 머무는 것이 국제적 예의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세종은 “우리의 말은 다르니, 그 말에 맞는 우리 글자가 있어야 한다”며
자주적 문화 독립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문자 창제를 넘어서, ‘우리는 우리 말과 글로 기록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대주의자들에게는, 이 시도가 대국 명나라의 눈치를 무시한 자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세종은 이런 반발을 예상하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훈민정음 창제를 극비리에 진행했고, 일부 집현전 학자들과만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공식적으로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을 때도,
그것을 ‘백성을 위한 문자’라고 강조하며
‘양반 지식인’들의 글쓰기와는 별개라는 인식을 심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인지, 성삼문, 최만리 등 여러 인물들이 훈민정음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기도 했죠.
특히 최만리는 격렬한 반대를 표하며 상소문을 올렸고,
세종은 조목조목 반박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단호했습니다.
"나는 듣지 못한 말을, 백성들은 늘 쓰고 있다. 그 말을 기록할 수 있는 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은 단지 글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책임과 배려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은 찬란한 결과이지만, 그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반대와 두려움,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저항 속에서
세종은 한 사람의 목소리도 잊지 않겠다는 각오로 새 글자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한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사실은,
단지 편리함을 넘어서
그 어떤 반대 속에서도 ‘사람’을 선택한 한 왕의 용기를 기억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