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왕의 인간적인 순간들
“세종대왕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우리는 흔히 세종을 ‘성군(聖君)’, ‘과학의 왕’, ‘훈민정음의 창제자’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찬사 뒤에는, 우리가 자주 놓치고 있는 또 다른 세종의 모습들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은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종대왕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세 가지를 조명해보려 합니다.
그는 위대한 군주이기 이전에, 아주 깊은 내면을 지닌 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종은 과학과 제도의 왕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굉장한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시를 쓰고 음악을 만들며, 왕의 일상 속에서 감정을 다듬었습니다.
특히 『용비어천가』는 단순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과 나라에 대한 경외를 노래한 시문학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세종은 자신의 아픔과 고뇌를 시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고단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백성을 향한 걱정 등이
그의 시에서는 담담하게, 그러나 깊게 묻어납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도, 그가 ‘언어’와 ‘표현’의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단지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느끼고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말년에 심한 당뇨병과 시력 저하를 앓았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당뇨 합병증, 녹내장, 시신경 위축까지 의심될 정도로
시력은 거의 실명 수준까지 악화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많은 국정 업무를 집현전 학자들에게 구술로 전하고,
의관(의사)들과 논의하며 병세를 조절해가며 통치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병세는 단순한 개인의 고통을 넘어,
정치를 향한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백성이 글을 몰라 고통받는 모습을 두고,
몸이 망가져도 글자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세종은 단지 건강한 영웅이 아니라,
병든 몸으로도 책임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을 아꼈다’는 일화로도 자주 회자되지만,
사실 그 둘 사이에는 조용히 끝맺은 아픈 장면이 있습니다.
장영실은 세종이 아끼던 과학자였고, 수많은 발명품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세종의 가마를 제작하던 중 구조적 문제로 낙마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일 이후, 장영실은 궁에서 사라집니다.
기록은 간결합니다.
“장영실은 죄를 받고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은 그 이후에도 장영실을 벌하지 않았고, 다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이 결정은 애정과 공정성 사이에서 세종이 내린 고독한 선택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를 향한 실망, 그러나 처벌하지 않는 절제.
그것이 세종다운 리더십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종을 '완성된 군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돌아본 세종은 조금 달랐습니다.
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던 사람,
고통 속에서도 사명을 놓지 않던 사람,
사적인 감정을 넘어서 공적인 판단을 했던 사람.
위대한 인물일수록,
그의 ‘인간적인 결’은 더 많은 감동을 줍니다.
세종은 단지 훌륭한 왕이 아니라,
가장 고통스러울 때조차 ‘누군가를 위한 일’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세종대왕의 가족 이야기와,
그의 인간관계 속에 담긴 또 다른 역사적 단면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거리'에서, 또 다른 세종을 만나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