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 에세이
간혹 나이 많은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보면 했던 말을 또 듣는 경우가 있다.
분명 전에 들었던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고분고분 듣는다.
난 집안 사정으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함께 산 기간이 12년,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방학 때 찾아가서 함께 한 기간이 10년.
도합 22년이란 시간을 그녀와 함께 했다.
어릴 적부터 그녀의 삶을 들었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를 너머 6•25를 거쳐 격동의 대한민국을 지났다.
그 긴 세월 그녀의 삶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이란 생각에 크게 공감했다.
도서관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수많은 장르의 여러 책들이 하나의 도서관에 차곡차곡 꽂혀 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 먼저 내 곁을 떠난 외할머니를 그리다 문득, 내게는 거대했던 도서관이 문을 닫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살아생전에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는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사춘기를 겪을 때에는 그 이야기가 고장 난 라디오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은 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인가.
언젠가부터 지인들에게 ‘그 얘기 저번에 들었어.’라는 말을 듣고는 했다.
처음에는 무안해하며 이 이야기를 주변에 했구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에서야 나도 외할머니처럼 나이 들어가는구나 싶었다.
그럼 왜 똑같은 말을 하는 걸까.
사건의 한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사람은 일상을 보내고 특별한 사건을 기억해 이야기로 꾸민다.
남들이 하지 못한 특별한 일상은 하나의 사건이 되기도 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거기다 기억까지 나지 않은 일상은 이야기 소재로 탈락된다.
가령 일 년 전 어느 날, 하루를 끝마치고 와서 씻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잠들기 전까지 유튜브를 본 이야기를 타인에게 굳이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신선한 이야깃거리를 몇 개 갖고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청중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람을 자주 만나는가.
대부분 그렇지 않다.
늘 알던 사람과 대화를 할 상황이 많다.
그러니 결국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건 아닐까 싶다.
어릴 때는 몰랐다.
외할머니가 같은 이야기를 하면 언젠가는 시큰둥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철이 들었을 때는 궁금해하는 척하며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궁금하진 않았다.
이미 이야기 시작부터 결말까지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그때는 너무 많이 들어서 희미해진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더 이상 폐관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는데, 그 도서관에만 있는 책이 그리운 날이 있다.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가 늘 흥미롭거나 즐겁지는 않다.
우리는 그걸 안다.
때로는 모른 척하고 듣기도 한다.
때로는 이미 들은 이야기라며 스킵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그 도서관에서 더 이상 책을 빌릴 수 없지는 않을까.
그리운 도서관들이 있다.
지금은 열고 있지 않은.
그 도서관을 아는 이라면 함께 추억하기도 하지만, 읽었던 책이 다르거나 같은 부분을 다르게 기억하기도 한다.
외할머니를 보내고 나서 와닿을 정도로 느낀 단어가 있다.
그건 바로 ‘사무치게’라는 단어다.
매일, 매 시간 그런 건 아니지만, 문득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햇빛이 포근하게 비추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 올랐다.
내가 기억을 잃어간다는 건, 신이 우리 사이를 시샘해서 천국에 내 기억의 조각을 조금씩 옮겨 두는 거라고.
외할머니는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그 문장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외할머니, 어머니의 삶을 녹여낸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
저 문장을 이야기로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난 완전한 독자였다.
완벽한 독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주제에 감히 글을 어떻게 쓰냐고 생각하는 완전히 독자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넘을 수 없는 선을 기어코 넘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한 문장이 내 삶을 흔들어 놓았다.
새로운 걸 잡으려면 쥐고 있는 걸 놓아야 했다.
글쓰기 시간을 늘렸다.
모르기에 조언도 구하고 배우러 가기도 했다.
매번 쓰면서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꼭 내 손으로 그 이야기를 매듭짓고 싶다.
오늘도 난 그리워하던 도서관을 몰래 방문한다.
거기에 꽂힌 책들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내 도서관에 옮겨적고 있다.
들었던 이야기를 머리가 아닌 가슴에 새겨보고 싶은 날이다.
당신의 애착 도서관, 소개해줄래요?
백경 에세이 초반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벌써 알아차리신 분 계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