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처음으로, 무작정

백경 에세이

by 백경

무작정 서울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출판학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들어가고 싶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작가가 되기 전에 출판사에서 근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채용예정자 과정이 있어서 교육이 끝난 후 출판사로 취업까지 해결되었다.


비전공자인 내게는 좋은 기회였다.

모집 기간 한 달 전에 고향을 떠났다.


내게 서울행을 제안했던 디자이너 I 씨와 그의 형 M 씨 덕분에 큰 노고 없이 서울에 보금자리가 마련되었다.


그 무렵 난 온전한 자유 시간을 가졌다.

무리에 속해서 행동한 탓에 자유 시간은 어색하기만 했다.

웹소설은 쓰지 않았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서 일자리를 구해야 했는데, 출판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기간이 짧아서 어중간한 상태였다.


그 무렵 난 서울을 돌아다녔다.

크게 놀러 다닌 건 아니고, 주로 도서관 투어를 했다.


도서관은 내게 정겨운 공간이다.

어릴 적부터 도서관에 갔었다.

서울에 거처는 구했지만, 유목민답게 짐을 많이 꾸려서 오지는 않았다.


필요한 책은 도서관에서 수급했다.

출판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소서, 서평, 독서이력서가 필요했다.

서평은 책 한 권을 출판 편집자적 시점에서 분석해야 했다.

독서 이력서에 들어갈 30권 분량의 책들을 소개해야 했다.


써야 될 것들이 많았다.

거기에 생활비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다.


진정한 유목민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는 동생 덕분에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충무로에 있는 한 인쇄소였다.

우연한 계기로 책을 만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니.

서울에서의 시작이 순조롭다 생각했다.


그곳에서 출판학교 출신을 만났다.

함께 일하러 온 아르바이트생이었는데, 대화 중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게도 전달될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었다.


인쇄소 아르바이트가 끝날 무렵.

난 속이 불편함을 느꼈다.

<쓸개 없는 사람의 쓸 게 없는 브런치>에서 밝힌 것처럼,

그때 즈음 아파서 식사를 거른 날이 있었다.

쓸개가 다 곪은 줄도 모르고 약을 받아와 먹으며 하루하루 버텼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이 주 정도의 온전한 내 시간이 주어졌다.

일하는 동안 출판학교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원서 준비를 위해서 다시 도서관 투어를 했다.

독서 이력서에 들어갈 30권을 찾으러 다녔다.

전자 시스템이 잘 된 덕분에, 출발 전 도서관에 원하는 책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삼 대한민국이 참 살기 좋은 나라라는 걸 실감했다.


그때 난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하루에 두 권의 책을 읽는 건 보통의 일이었다.

왜 그랬냐면 그간 읽었던 책들을 독서 이력서에 넣기에는,

근 몇 년 책을 많이 읽지 못했고, 읽은 책마저도 소설들 뿐이었다.

독서 편식이 심하다고 느꼈다.


다양한 책하고 신간인 책을 독서 이력서에 넣고 싶었다.

책을 찾아 자리에 앉고 읽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이 책들을 잘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읽었다.

독서가 즐겁다가도 일이 되는 순간 힘들다는 걸 느꼈다.

하루가 끝나면 정성스럽게 적은 독서 이력서와 함께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빨리 흘렀다.

출판학교에 원서를 냈다.

서류 심사 다음 필기시험이었다.


서류를 제대로 써서 냈지만, 불안했다.

과거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초라하게 느껴졌다.

떨어질 것도 같았지만 필기시험을 버려둘 수는 없었다.


발표 때까지 계획을 짜서 공부를 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은 걸까.

필기시험에도 가보지 못하고 떨어졌다.

회복탄력성 낮은 내향인 유목민은 좌절했다.


그렇다고 뭐, 별 수 있나.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기 전.

생각을 정리했다.


난 왜 출판 편집자가 되려 했던 걸까.


단순히 책이 좋아서.

소설가가 되기 전, 글을 많이 다룰 수 있는 곳이라서.

그 자리가 외적인 조건에 만족스러운 곳이라서.


따지고 보면 난 출판 편집자가 되고 싶은 이유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끝은 소설가로 향하고 있었다.


좀 불안하지만 둘러가지 않고 바로 간다.


경유지를 들르지 못했지만,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가기로 했다.

물론 그 사이에도 많은 경유지가 있을 것이다.


난 그렇게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내 인생 처음으로 계획 보다 먼저 움직였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