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08 Venice
여행의 실질적인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3주가량 지속된 여행에 조금 피곤했나 보다. 네 가족 모두 9시가 돼서 눈을 뜨고, 숙소 공용공간에서 조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곳 식사는 도우미분께서 아침에만 와서 준비해주는 시스템이다. 어제만 해도 전혀 식사 공간 같지 않아 보였던 곳에, 몇 가지 빵과 커피, 음료 등 음식이 놓이고 사람들이 모였다. 조용한 공간, 과하지 않은 조식. 멋진 분위기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다.
4개의 큰 테이블이 놓여있는 공용공간, 다른 테이블엔 외국인 가족과 한국인 가족이 있었다. 여행을 다니다 한국인을 만나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 한국 가족은 대학생에서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부모가 함께 여행을 온 것처럼 보였다. 그 나이 때 아들이 보통 그렇듯 두 아들 모두 말이 많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도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아마 그 가족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 네 사람 각자의 표정,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어린아이들을 베니스까지 끌고 와 아침을 먹는 우리 모습이 신기하셨나 보다. 식사하던 중년의 부부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먼 곳까지 온 우리 부부가 대단하다고 말씀하신다. 때로는 누군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우리 여행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도 당신 가족의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는 듯 보였다. 15년 전 자신들 인생의 가장 전성기, 그리고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되어버린 아들들이 꼬맹이였던 그 시절을. 그분들의 눈빛 속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나와 아내는 멀리까지 다 큰 아들들을 데리고 먼 곳까지 온 중년의 부부가 참 부러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가족의 미래를 상상했다. 과연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이렇게 함께 다닐 수 있을까? 아이들이 우리와 와줄까? 그때가 되면 우리 부부는 어떤 모습일지, 세현이와 세온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우리 가족이 나누는 대화와 표정 속에 사랑이라 부를만한 어떤 느낌이 담겨 있을지.
솔직히 나는 아이들을 빨리 키운 후 아내와의 둘만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 그런데도 그 가족을 보며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 방문했던 곳들을 넷이 함께 가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동료 교사로부터 아이들과 함께 다니고, 무언가 할 수 있는 것도 고작 10년 정도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아이들을 어딘가 데리고 다닐만한 3~4세부터, 부모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13~14세까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이야기를 듣고선 슬펐다.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십 대 중반의 남자아이에게 가족은 다소 귀찮은 존재일 수도 있으니까. 나의 십 대를 생각해봐도, 그리고 학교에서 만난 많은 아이와 부모의 이야기를 떠올려봐도 그렇다.
이탈리아 베니스 어느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한국인 가족의 모습 속에서, 십여 년 뒤 우리 아이들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부모를 대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함께 가든 가지 않든, 편하게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나는 부모님께 잘하지 못하면서도, 내 아이들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것을 보니 역시 인간은 참 이기적이다.
조식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준비를 마치니 거의 11시가 다 되었다. 계획한 오늘의 일정은 리알토 다리를 거쳐 산마르코 광장에서 사진 촬영. 이후 Mestre역 부근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으나, 시간상 한식당까지 가기엔 무리였다.
우리는 일단 로마광장으로 향했다. 수상 버스 티켓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베니스에선 모름지기 걸어 다녀야 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왔지만, 아이들과 다니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총 40유로, 적지 않은 돈으로 actv 24시간 권을 샀다. 하지만 미처 생각지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 수상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가니 벌써 많은 인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리알토 다리까지 가는 2번 수상 버스 타려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간은 시간대로 지체되고, 너무 더워 부모와 아이들 모두 짜증이 잔뜩.
한참을 기다려 어렵사리 리알토 다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역시 이곳도 사람으로 붐빈다. 그 유명한 다리 위에 올라갈 엄두도 나질 않았다. 결국, 우리는 아래서 간단히 사진만 찍고, 산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길은 울퉁불퉁, 곳곳에 있는 다리 때문에 유모차가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마음 같아선 유모차를 버리고 싶었지만, 아이들 낮잠을 또 재워야 했기에 질질 끌고 다닐 수밖에 없다.
베니스에 오면 누구나 산마르코 광장에 들르기 마련이지만, 우리 가족에겐 산마르코 광장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내와 내가 결혼 후 베니스에 왔을 때, 시차 적응에 실패해 새벽같이 산마르코 광장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 하나 없는 산마르코 광장을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2014년 1월 겨울 새벽, 아내와 나는 텅 빈 산마르코 광장에서, 마치 우리만을 위한 공간인 듯 사진을 찍고 놀았더랬다. 그리고 그 사진이 참 맘에 들어, 아이들과도 비슷한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광장 분위기는 전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새벽의 느낌을 떠올린 우리 부부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많은 인파와 엄청난 비둘기들, 카메라 도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아이들을 혹 잃어버릴까 나와 아내는 완전히 공황 상태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선 아이들의 상태도 중요하다. 지금은 여러모로 타이밍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결국, 몇 컷 사진만 남긴 채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광장 근처에서 적당한 식당을 찾아 점심을 해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몇몇 식당을 찾아갔지만, 자리가 없거나 운영 시간이 아니어서 번번이 실패. 식당을 찾으며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 호텔이 멀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식사 후 아이들을 들어가서 재우기로 하고, 호텔 근처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숙소 근처에 Ai garzoti 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었다. 구글에서 찾은 4.6점짜리 식당. 위치도 평점도 메뉴도 우리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는 식당에 도착해 버섯과 햄 피자, 해산물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역시 높은 평점의 식당은 만족스럽다. 피자와 스파게티 모두 훌륭했다. 덕분에 아이들도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여행 전까지 밥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우리 온이는, 스파게티의 맛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동안 밥 아니면 안 먹는다고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들어왔다. 날씨가 더워 밖에서 아이들이 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마지막 여행 날 조금 시간이 아깝기도 했지만, 다들 지쳤다. 에어컨을 틀고 방 안에서 자는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네 가족 모두 숙면을 할 수 있었다. 2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서 사진 몇 장을 남기고, 수상 버스를 이용해 산타루치아역으로 향했다.
이제 정말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 시간이다. 여행의 마지막 도시가 베니스라니. 이 도시를 올 때마다 느끼는 미묘한 느낌과 여행의 막바지에 느끼는 감정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베니스 본 섬의 산타루치아역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그 감정. 새롭게 도시에 오는 사람들,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역을 나서자마자 확인할 수 있는 수상 도시 풍경은 우리의 그리움을 자극한다.
역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그리움을 느끼며 여행을 마무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터이지만,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우선 아내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야 했다. 역 안에 있는 KIKO 매장에서 몇몇 선물을 샀다. 오래전 아내와 둘이 왔을 때 들렀다 바로 그 매장이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급하게 다시 길을 나섰다.
수상 버스로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마트에 잠시 들렀다가 저녁 식사를 위한 식당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저녁 식사를 어디에서 하면 좋을까 많이 고민하다, 결국은 점심 먹은 식당에 다시 가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역시 갔던 곳에 다시 가는 선택을 할 때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다. 저녁 7시가 다 되어 식당에 들어가 봉골레 파스타와 새우 리조또를 주문했다. 역시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선 수상 버스를 타고 곧장 리알토 다리 이동했다. 이번엔 밤의 리알토를 보고 싶었더랬다. 리알토 다리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이 나와 아내를 자꾸 조급하게 만드나 보다. 리알토에서 간단히 사진 찍은 후 이번엔 산마르코 광장으로 이동하는 길, 세현이가 낮에 가고 싶다고 졸랐던 Venchi라는 이름의 초콜릿 가게에 들어갔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세현이가 고른 초콜릿 몇 개와 한국에 지인들에게 줄 초콜릿과 함께 계산대로 향했다. 만만치 않은 초콜릿 가격 때문에 아내는 할인이 되는 품목을 고르려고 했다. 그러나 아마도 다른 상품 가격표와 착각했는지, 계산하면서 보니 총 35유로 정도의 금액이 나왔다. 초콜릿의 비싼 가격에 놀란 나는 아내를 나무랐다. 아내는 미안해하면서도, 남편의 과한 반응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사실 돌이켜보면 정말 별일 아닌 해프닝이다.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는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왜 내 감정이 그렇게까지 불편했는지 모르겠다. 시간에 쫓겨서인지,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선 손님들로 북적이는 가게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것일까. 비싼 초콜릿을 사는 게 싫었던 것일까. 불편한 감정을 사소한 실수를 한 아내에게 있는 그대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나와 아내 사이의 잠깐의 정적.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내도 아내 나름대로 그런 남편의 태도가 꾀나 서운했었나 보다. 그 멀리까지 가서, 여행의 마지막 날 충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서로 불편한 감정을 부여잡고, 산마르코 광장에서 고작 3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서야 다시 생각해보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불편한 감정으로 보냈단 사실을 그제야 직시하게 됐다. 몇만 원 초콜릿 그게 뭐라고. 대체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산마르코 광장에 갔을 때 양쪽 측면에서 음악 공연팀의 아름다운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인가. 여행의 마지막 밤, 베니스의 광장에서 음악을 들으며 여행을 마무리할 기회를 고작 초콜릿 몇 개에 놓치고 말았다. 못내 아쉽기만 하다. 여행 후 지난 시간과 내 선택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더 많이 사진을 찍지 못한 것도, 아이들 영상을 남기지 못한 것도 아쉽다.
아니, 어디 여행뿐이겠나. 아이들과 보내는 매 순간이 그렇다. 한 살, 두 살, 세 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때 좀 더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해주지 못한 것에 늘 아쉬움만 쌓인다. 그 아쉬움을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함께 지내며, 조금씩 나아지겠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을 재웠다. 새벽에 다시 산마르코 광장에 가기로 했다. 마지막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광장도 조금은 한적할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마지막 밤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