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4 Budapest
유럽으로 가는 직항 편. 거의 편도 수준의 저렴한 가격.
돈 때문이라고 말하기 영 폼은 안 나지만, 그 이유가 가장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50만 원대 유럽 직항 왕복 항공권이라니! 우리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부다페스트로 여행을 계획했다. 예약하고, 결제할 때까지만 해도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마냥 기뻐했다. 하지만 여행 날이 다가올수록 비행 출발 시간이 너무 일러 부담되기 시작한다.
아침 8시 30분 인천공항 출발. 지난 유럽 여행 때 공항에서 시간이 촉박해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늦어도 6시까진 공항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일찍 갈 수 있는 방법이 마땅히 없다. 경기 의정부 집에서 첫차를 타고 가도 늦고, 차를 가져가기엔 여행 기간이 너무 길어 걱정이다. 장기 주차를 하더라도, 추운 날씨에 차가 방전되면 어쩌지? 거의 3주의 시간을 추운 외부에 주차해놓기엔 무리라고 느꼈다. 고민 끝에 서울 은평구 부모님 댁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여행 이틀 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며 짐 챙기는 요령이 조금 생겼다고 해야 할까. 가장 큰 목표는 짐 줄이기. 서울이 제일 추우니 웬만한 옷은 껴입고 가기로 하고, 캐리어엔 잠옷 위주로 챙긴다. 먹을거리도 마찬가지. 현지에서 웬만한 물건을 다 구할 수 있다. 여행 초반 급할 때 먹을 수 있는 거 위주로 간소하게 준비한다.
짐을 챙기고 보니 아이들 짐이 부모 것보다 훨씬 많다. 찬찬히 살펴보면 현지에서 다 구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노파심에 이것저것 챙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나와 아내의 성향 때문일까. 아니면 부모의 마음이 다 이런 걸까. 줄인다고 고민하고 애를 썼지만, 4인 가족의 20일 여행 짐은 여전히 무겁다.
여행 하루 전. 점심을 먹은 후 부모님 댁으로 출발. 긴 겨울 여행에 대한 걱정도 있었고, 비행기를 놓치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도 있다. 집을 떠나니 아이들은 이미 여행을 떠난 기분인지, 그저 신나서 즐겁단다. 아마 처음 갔던 유럽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는 건 아닐 테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 간다는 사실에 그저 설레는가 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기에 네 가족 모두 늦지 않은 시간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가장 먼저 잠에서 깼는데, 일어나자마자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2시 30분이었다. 아직은 아니다. 좀 더 자려고 눈을 감아보았지만, 잠이 올 리 만무하다. 뒤척이다 3시 30분쯤 아내가 잠에서 깼다. 일어나서 조용히 짐을 챙기고 준비를 시작하던 중 부모님도 잠에서 깨셨다. 부모님을 좋은 곳 여행 보내드려도 모자랄 판에, 자식들 멀리 여행 간다고 일찍 일어나게 해 드려 영 죄송하기만 하다. 죄송한 마음에 이제 아이들도 컸으니 공항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공항으로 향하는 첫차는 4시 39분. 버스 정류장이 멀지 않아, 4시 20분쯤 집에서 나서기로 했다.
혹 아이들도 일찍 일어날까 싶었는데, 계속 자고 있다.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외출복을 입혀 재우길 참 잘했다. 아이들을 안고 차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버지께서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짐을 챙기고,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 집을 나서는 순간 아이들이 잠에서 깬다. 오히려 잘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더 오래 잘 수 있겠지.
서울 은평구 증산역 앞 버스 정류장. 새벽 공기가 꽤 차갑다. 아버지 차 안에서 잠시 대기하다 무사히 첫차를 탈 수 있었다. 혹 자리가 없을까 걱정했지만, 그 과도한 걱정이었다.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공항에서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아이들과 여행할 땐 최대한 효율적인 이동 경로를 고민해야 한다. 공항 동편과 서편 어디에서 버스를 내려야 탑승구와 가까운지. 공항 라운지는 몇 시부터 운영하는지 등 필요한 정보를 찾는다. 나와 아내는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게 어려운 사람들이다. 미리 준비하면 보다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겠지만, 본래 지닌 이 성향은 참 바꾸기 어렵다. 부부 둘 다 이러니 누구 하나 탓할 수도 없다. 그냥 거기에 맞춰 여행하는 수밖에.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도로는 부쩍 한적하다. 아이들은 밤에 떠나는 여행이 신기한가 보다. 버스에서 잠이 들까 싶었는데, 의외로 잘 버틴다. 부모처럼 설레는 마음 때문일까. 2018년 여행 때는 멋모르고 부모에게 끌려갔다면, 이제는 여행이 뭔지 조금은 아는 눈치다. 하얗게 김 서린 버스 창문에 자기 이름 쓸 정도로 아이는 자랐다. 여전히 부모 욕심에 떠나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기왕 가는 거 아이들도 즐거워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5시 30분 무렵 공항에 도착했다. 매번 느끼지만 공항에 일찍 도착하는 것은 여행 컨디션에 꽤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난 여행에서 했던 고생을 교훈 삼아, 수화물 무게도 잘 맞추어 왔기에 별 탈 없이 탑승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오늘은 공항 라운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곧장 보안 검사를 마치고 면세구역으로 들어오니, 이제 정말 여행을 출발하는 실감이 난다.
이른 새벽이지만, 탑승 구역은 사람들로 활기차다. 무엇보다도 탑승 구역 중앙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아름답다. 해가 바뀌고, 크리스마스도 일주일 전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이곳은 여전히 크리스마스다.
부모가 되기 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내와 시내에 장식된 트리를 구경하기 위해 나가곤 했다. 물론 지금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이야기다. 추운 날씨, 늦은 시간, 그 많은 인파 속에 아이들과 외출이라니. 첫째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 잠 문제로 힘들어했던 우리 경험 때문에, 우리 부부는 지금도 아이들을 일찍 재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덕분에 우리 가족에게 밤 8시 이후 집 밖 상황은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밤에 혼자 운동하러 나가 다른 집 아이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낯선지. 공항에 와서야 화려한 트리를 보고, 이미 지난 크리스마스 기분을 가족과 공유한다.
조금 늦은 크리스마스의 감동을 뒤로한 채 면세품 수령 장소로 향했다. 아이들이 좀 더 어렸을 땐 대부분이 아이들 물건이었는데, 이제 조금은 부모의 것과 균형이 맞는 듯싶다. 이번에 주문한 물건 중 가장 중요한 물품은 바로 아이들 유모차. 지난 18년도 여행 때는 쌍둥이 유모차를 끌고 여행을 했지만, 아이들이 이제 너무 커서 쌍둥이 유모차는 도저히 무리다. 면세점에서 휴대용 유모차를 저렴하게 판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나가는 길에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물건을 무사히 수령한 후 아침 식사를 하러 라운지로 향했다.
시간 여유가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7시. 조금은 부지런히 아침을 먹고 탑승구로 가야 할 듯싶다. 성인은 카드 서비스로 무료. 세현이 요금은 결제하고, 둘째는 아직 무료이다. 5월이 되면 36개월이 지나기에 이것도 아마 마지막 누리는 호사가 아닐까 싶다. 면세품을 받는 것이 해외여행의 필수 코스가 된 것처럼, 언제부터인가 라운지에서의 식사도 그렇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먹을거리가 충분하진 않았지만, 여행 전의 설레는 감정을 누리기엔 충분했다.
다소 급하게 식사를 마치니 7시 30분이 되었다. 이제 곧 있으면 탑승 시작할 시간. 우리는 다소 급한 마음으로 짐을 챙겨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31번 탑승구에서 출발. 그나마 가까워서 다행이다. 아이들과 기내에서 화장실을 오고 가는 일이 너무 번거롭기에 반드시 탑승 전 화장실을 들르는 것이 중요하다. 네 가족 모두 화장실에 들렀다가 비행기에 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탑승구 승무원에게 유모차 수화물 처리를 요청했고, 승무원은 친절하게 처리를 해주었다.
비행기에 탑승해 우리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8시 10분이 되자 비행기가 이동하기 시작한다. 통상 승객 탑승이 늦어지거나 하면 이륙이 지연되는 일이 빈번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정확히 8시 30분 비행기는 이륙을 위해 속도를 높이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좌석벨트 표시등이 꺼졌다. 이륙하면서 혹시 아이들 귀가 먹먹할까 봐 사탕을 주었는데, 다 먹으면 자기로 약속했다. 라운지에서 밥을 먹고 왔으니 기내식도 당장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
비행기 안내 방송을 보던 세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어렸을 때 잠투정에 부모를 힘들게 했던 걸 떠올려보면 많이 성장하긴 했다. 하지만 세온이가 안 잔다. 일 년 전만 해도 부모에게 온이 재우는 일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형 재우는 일에 고생하는 엄마, 아빠를 위해서였을까. 어린 온이는 알아서 잘 잤다. 다만 세현이 재우는 일이 이제 조금 할만하다 느낄 무렵, 온이 재우는 일이 어렵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거 같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둘째 녀석이 수다쟁이가 되었다. 뭐라 하는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좀 더 어렸을 땐 그렇게 괴성을 질러대곤 했는데, 아마 수다 떨고 싶은데 말을 할 줄 몰라 그런 건 아니었을까. 분명 그 시절엔 소리를 꽥꽥 지르는 녀석이 참 불편했는데, 이제 조금은 그 심정이 이해가 된다. 그래도, 잤으면 좋겠는데 안 자고 계속 조잘조잘 떠드는 온이로 인해 부모는 고민이다. 겁을 주기도 하고, 반협박을 해보지만, 이 녀석에겐 대체 먹히지 않는다. 한참을 실랑이 벌이다 겨우 잠들었다.
아이들이 잠든 지 한 시간 조금 지났으려나. 부모도 눈을 붙여볼까 하는 순간 세현이가 잠에서 깼다. 새벽부터 이동하느라 많이 피곤했겠지만, 아마 비행기 안에서 자는 게 불편했을 터. 2년 전 여행 같았으면 어떻게 서든 더 재워보려고 노력했겠지만,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부다페스트에 도착해서 잘 자는 것도 중요하니까.
우선 받아놓았던 기내식을 먹어야겠다. 탑승 전 라운지에 들러서 이것저것 먹고 온 탓에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음식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 비행기 탑승 전 미리 아이들에게 맞는 기내식을 주문했었다. 기본 기내식 자체도 아이들이 먹는 데 큰 무리는 없지만, 아이들 용을 주문하면 그에 걸맞은 음료나 간식거리가 나와 좋다. 세현이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난생처음 보는 음료를 마시고선 즐거움을 감추지 않는다.
식사를 마친 후 세현이는 면세점에서 받아 온 레고를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여행을 오면서 미리 장난감을 준비했다. 온라인 면세점을 함께 구경하면서 세현이는 레고 장난감을, 온이는 점토 놀이 세트를 주문했다. 1시간, 아니 30분이라도 가지고 놀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짐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새로운 장난감을 가진다는 것은 아이들을 충분히 즐겁게 하기에 돈이 아깝지 않다.
13시쯤 온이도 잠에서 깬다. 온이는 그래도 3시간 이상 잤다. 일어나자마자 엄마와 함께 다 식은 점심을 먹기 시작한다. 조금 배가 고팠는지 생각보다는 잘 먹어줘서 고마웠고, 온이의 주특기대로 오래 걸리지 않아 감사하다. 식사를 마치고 온이는 잠시 점토 놀이를 잠시 주무르다, 이내 영상을 보기 시작한다. 온이는 같은 영상을 반복해서 보는 걸 좋아하는데 덕분에 오프라인 영상을 준비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14시쯤 세현이에게 다시 낮잠을 자라고 이야기한다. 오전에 생각보다 너무 일찍 잠에서 깨는 바람에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웬일로 세현이가 순순히 부모 요청에 응해주었고, 20분 후 눈을 감는다. 사실 기대하진 않았는데, 이럴 때면 부모가 더 놀란다. 이제 6살이 되어서일까. 자기주장이 퍽 강해져 때로는 부모와 다툼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제 아기 티는 벗고 어린이가 되었다. 문제는 아기가 아니라 자는 시간이 짧다는 것. 1시간 만에 세현이는 또 잠에서 깬다. 아빠도 조금 눈을 붙이고 싶어 세현이에게 더 자라고 강요해보지만, 이는 공허한 감정싸움일 뿐이다. 도저히 더 잘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도착까지 아직 5시간이나 남아있는데.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고민이다.
장난감 놀이. 영상 시청. 두 번째 기내식으로 저녁 식사. 이것저것 하다 보니, 마치 우리 인생처럼 어떻게든 시간은 흐른다. 아이들도 불편한 좌석에서 영 힘든 눈치지만, 생각보단 잘 버티고 있어 다행이다. 착륙할 준비를 위해 비행기 조명이 다시 밝아지고, 창문 밖으론 다시 해가 떠오른다. 한국시각 20시, 현지시각 12시. 아이들 밤잠을 재우기 위해 침대로 향할 시간이지만, 우리 가족은 2022년 1월 4일 두 번째 오후를 준비한다.
우려한 것보다 아이들이 잘 와줘서 뿌듯하고 기특하다. 직항 비행기이니 내려서 환승을 해야 할 걱정도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2018년 긴 비행 후 힘들어하던 아이들의 모습과 비교하면, 다시 한번 아이들이 자랐음을 느낀다. 단, 부모는 해가 갈수록 장거리 여행이 점점 힘들어짐을 느낀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12시 30분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짐을 챙겨 나오고, 위탁 수화물까지 챙기느라 시간이 많이 흘렀다. 공항에서 나오니 어느새 오후 2시가 되었다. 아무리 미리 계획하는 일에 소극적이라 하더라도, 시내로 향하는 교통편 정도는 미리 알아봐 두었다. 우리는 100E 버스를 타고 페스트 지구 중심부로 향했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까. 생각보다 금방 대관람차가 있는 Elizabeth Square 인근의 Deák Ferenc tér M 정거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의 첫 숙소가 부다 지구에 위치한 호텔이기 때문에 다시 이동해야 한다.
버스에서 내려 느낀 부다페스트 거리의 첫인상은 여느 유럽 도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겨울 날씨도 서울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저렴한 항공권 덕분에 계획에도 없던 도시이지만, 그 야경으로 유명한 이 도시가 참 기대되면서도. 얼마 전 있었던 유람선 사고를 생각하면 또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오늘은 일단 들어가서 휴식을 취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우리는 Bolt 어플을 이용해 택시를 호출했고 10분 정도 걸려 Novotel Budapest Danube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하고 보니 아이들 잘 시간이 넘어도 한참 넘었다. 두 녀석 잠 문제에 예민한 부모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겨울의 유럽은 해가 짧은 게 감사한 일이라 해야 할까. 아직 한창 활동할 시간이지만, 금방이라도 어두워질 것만 같다. 우리 부부에겐 아이들을 빨리 재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기내에서 낮잠도 얼마 못 잔 두 녀석. 사실 온이는 이미 공항버스에서부터 자고 있지만, 언제 또 깰지 몰라 노심초사다.
오후 3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지만 호텔에서 감사하게도 체크인을 해준다. 세현이는 목마르다고 계속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이 녀석은 어찌나 음료수 마시는 걸 좋아하는지. 아들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생수와 기타 간식도 살 겸 홀로 길을 나섰다. 호텔 인근 큰 슈퍼마켓 체인인 SPAR가 있어서 다행이다. 유럽에 와서 마트에 가는 일은 늘 설렌다. 저렴한 물가와 새로운 물건들. 내일은 모두가 같이 와야지. 호텔로 복귀하고, 세현이는 아빠가 사 온 음료를 마신 후 대략 16시 30분 무렵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했는지 아내도 금세 잠이 들었고, 나는 카메라 정리를 마친 후 17시 30분경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이게 여행 첫날의 끝은 아니었다. 역시나 시차가 문제다. 날짜가 바뀌긴 했지만, 밤 12시 30분 온이가 잠에서 깼다. 공항버스에서부터 거의 10시간을 잤으니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창문 밖은 밤이 한창인데, 우리 가족은 휴대폰 날짜가 바뀌자마자 일어나 아침을 맞이했다. 물론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 새벽이 막막하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잠에서 깬 온이는 배가 고프다고 성화다. 한국이면 아침을 먹을 시간인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식사를 하기로 한다. 들고 온 라면 포트를 이용해 즉석밥을 데우고, 간편식으로 먹을 수 있는 덮밥을 부어 먹는다. 혹 다른 방에 음식 냄새가 가진 않을지 걱정에 최대한 간소하게 배를 채웠다. 아이들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저 호텔에 왔다는 사실이 좋은가보다. 가지고 온 인형과 장난감을 들고 한참을 놀다 새벽 3시 반이 되어서야 다시 자기로 한다. 세현이는 거의 바로 잠들었고, 온이는 거의 5시가 되어서야 눈을 감았다.
길고 긴 하루가 이제야 끝난 기분이다. 항상 여행 첫날을 마무리하는 감정은 참 오묘하다. 지친 마음과 감사. 여행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등 복잡한 마음을 간직한 채 눈을 감는다. 무엇보다 지난 여행과 비교해 아이들이 정말 많이 자랐다고 다시 한번 느낀다. 부모도 처음 방문한 부다페스트에 대한 막연함과 서울과 비슷한 추운 겨울 날씨.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잘 따라주리라 믿으며 내일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