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 Porto
포르투에서의 첫 아침.
추위를 걱정한 거치곤 잘 자고 일어나 다행이다. 아이들은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잘 노는 걸 보니 컨디션도 나쁘진 않다. 아이들이 방에서 노는 사이 간단히 방 정리를 하고, 시계를 보니 10시를 가리킨다. 이제 슬슬 준비하고 나가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스페인 시간으로는 11시. 거의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 가고 있다. 오늘 아침은 맥도널드에 가서 먹기로 했다. 포르투에서의 일정은 아내에게 부탁을 했는데, 아내가 야심 차게 준비한 코스이다. 갑자기 웬 맥도널드냐고 할 수 있겠지만, 포르투에 아주 유명한 맥도널드(McDonald's Imperial)가 있다고 한다.
사실 연애 시절부터 아내의 햄버거 사랑은 늘 각별했다. 아니, 그전부터 햄버거를 너무 좋아해 장인어른께 혼나기도 했다고 들었다. 나도 햄버거를 즐기는 편이다. 사실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동료 선생님이 햄버거로 하루 세끼를 다 먹을 수 있냐고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세끼 다 햄버거를 먹어도 맛있고, 또 먹고 싶다면 그 때야 비로소 햄버거를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우스갯소리였다. 그 이후로 햄버거를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지만, 충분히 즐기고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연애할 때부터 딱히 먹을 게 없을 때 햄버거 전문점에 가면 웬만하면 오케이였다. 유럽 여행을 와서도 방문한 도시에서 꼭 한 번 이상은 햄버거를 먹는다.
가고자 하는 맥도널드는 리베르다지 광장(Praça da Liberdade)에 위치해 있다. 검색을 해보니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아침 겸 점심으로 맥도널드만 먹고 끝낼 순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는 부지런히 채비를 해서 길을 나섰다.
조금은 쌀쌀하지만, 아주 화창한 날씨.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던, 어제 오후 첫인상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집에서 맥도널드까지 대략 10분 남짓. 전혀 멀지 않은 거리인데, 워낙 경사로가 많아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가 쉽진 않다. 아름다운 타일 장식으로 유명한 상 벤투 역(São Bento)을 지나 코너를 돌면 광장에 도착한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맥도널드는 비교적 한적했다. 놀랍게도 1층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동양인이다.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귀를 기울여 파악한 결과 거의 한국인이었다) 곧 점심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우린 최소한으로 메뉴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햄버거와 감자튀김, 나와 아내가 마실 커피, 아이들 주스까지. 흡사 이곳까지 와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갈 수는 없어서, 마지못해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또한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름다운 공간이라고, 더 맛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무엇보다 넓어서 좋았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익숙한 말소리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름다운 정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긴 후 다음 일정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 일정은 바로 렐루 서점(Livraria Lello).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란 소개가 보인다. 아니, 불과 5분 거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와 서점이 다 있다니! 그동안 난 포르투에 와보지 않고 어딜 다녔던 것인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과장된 평가를 비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인간이란 존재가 그만큼 비교하고 등수 매기거나 구분 짓는 일에 익숙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자고로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등수를 매기기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여행을 다니면서 수많은 '세계 X위의 XXXX', '세계 몇 대 XXXX'라는 식의 설명을 듣곤 한다.
기억에 남는 장소가 몇 군데 떠오른다. 이십 대 초반에 갔던 일본 하코다테 야마 전망대의 야경(세계 3대 야경이라고 알고 갔다)과 나가사키 이나사야마 전망대 야경(일본의 신 3대 야경이라고 한다). 물론 두 곳 모두 정말 아름답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지 여부는 과연 누가 판단하는 건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에겐 1등일 수도, 누구에겐 별다른 영감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삐딱하게만 바라본다면, 어쩌면 여행의 재미는 반감될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비교하고, 등수를 매기고, 구분 짓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느 장소에 몇 등이라는 평가를 덧붙이더라도, 누구에게 상처를 주거나 크게 문제 될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이 정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좀 더 여행이 풍요로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지금 만난 이 장소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안에서 추억을 쌓을 수만 있다면.
또 한 번 도보로 10분 남짓. 렐루 서점 앞에 도착했다. 위치를 찾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입장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선 대기줄을 보며 부모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과연 줄을 서 입장을 할 것인지, 아니면 외부만 둘러보고 자리를 옮길 것인지. 솔직히 말하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입장을 포기했다. 나도 아내도, 그리고 아이들도 해리포터의 독자가 아니었다. 이 서점이 유명한 이유가 건축 자체로도 아름답지만(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조앤 롤링(Joanne Rowling)의 서점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아직 책을 읽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녀에게도 관심이 크지 않았다. 인터넷의 도움으로 내부의 사진을 구경하고, 외부에서 사진을 찍는 정도로 만족하고선 우린 자리를 옮긴다. 다음 일정은 즐거운 식사 시간.
아내가 서점 인근의 식당을 찾아 놨다고 한다. 포르투에 왔으니 문어밥을 먹어봐야 한다며 찾은 식당의 이름은 tascö이다. 경사진 도로를 아이들과 다니기 어렵지만, 반경 500미터 안에서 모든 일정이 진행되어 다행이다. 느린 걸음으로 10분 남짓, 식당에 바로 도착했다. 식당 분위기가 꽤 근사하다. 아내가 분명 그리 비싼 식당을 찾진 않았을 텐데, 여태껏 우리가 유럽에서 갔던 어떤 식당보다도 분위기는 고급스럽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아쉬움이 남을까 잔뜩 메뉴를 주문했다. 문어밥과 스테이크, 치킨 텐더, 그리고 그 유명하다는 포트와인까지. 오는 길에 맥도널드에 들려 배를 채운 탓인지 많이 허기지진 않지만, 순식간에 모든 음식을 남김없이 해치웠다. 혹 비릴까 걱정했던 문어밥도 우리 입에 잘 맞았고, 스테이크 소스도 정말 괜찮다. 치킨 텐더야 모두가 상상하는 바로 그 맛.
식사를 마치고 식당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한쪽 벽면에 칠판이 마련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흔적을 남겨 놓았다. 연인과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메모, 친구와 변치 않는 우정을 다짐하는 흔적. 우리 모두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가지만, 바라고 염원하는 것이 비슷하고 어쩌면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내도 칠판으로 향한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이곳에 왔을 때 이 메모는 사라지고 없겠지만, 아이들의 이름을 둘러싼 하트처럼. 세현, 세온이가 서로 사랑하고, 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따뜻한 곳에서 배불리 식사를 하니 몸이 나른해진다. 세현이 세온이도 무척 피곤한 눈치다. 그런데 첫째 녀석 모습이 심상치 않다. 아내는 단번에 단순히 졸린 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듯싶다. 아뿔싸, 머리에 손을 얹어보니 열이 난다. 여행을 와서 일주일 넘게 잘 버티고 있었는데, 드디어 올게 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말라가에서 지내다 조금 추운 지역으로 와서 그런 건지, 새벽에 자다가 추웠던 건지. 여행 중 열이 나는 건 비상 상황이다. 아이들 낮잠을 어떻게 재워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집으로 곧장 들어가기로 했다. 내일이면 리스본행 열차를 타야 하기에, 포르투에서의 시간이 아쉽긴 하지만. 그동안의 육아 경험상 아이가 아플 기미가 보일 땐 최대한 초기에 대응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행을 다니면서 아이가 아픈 적이 적지 않게 있었다. 가벼운 감기 증세는 기본이고, 열이 나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지기 마련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일본 시코쿠 지방에 갔을 때 이야기이다.
당시 세현이가 고열로 며칠을 시달렸다. 우리나라에서 열이 지속되는 경우 두 가지 종류(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해열제를 교차 복용하지 않나. 당시 타이레놀을 먹어도 열이 안 내려가 이부프로펜 계통 약을 찾아다녔지만, 구할 수 없어 고생했었다. 당시 약사의 이야기를 알아듣기로는 일본에서는 아이에게 이부프로펜을 투약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거 같았다. 당시 독감이 유행하던 시기여서, 우리는 결국 새벽에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가기에 이르렀다. 검사 결과 다행히 독감은 아니었는데, 그 새벽에 아이 둘을 데리고 말도 안 통하는 응급실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며칠 후 자연스레 열이 내려가긴 했는데, 그 사연이 또 재미있다. 응급실을 갔던 도시는 시코쿠의 마쓰야마(松山)였는데, 우리는 이후 고치(高知)라는 도시에 이동해 갔다. 그리고 고치란 곳에서 지낸 숙소가 정말 100년은 되었을법한 옛날 일본식 가옥이었다. 당연히 집 거실이 난방이 전혀 안돼 엄청 추웠는데, 그 추운 곳에서 지내니 어쩔 수 없이 열이 내려간 것 같다고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한다.
지금 포르투의 집도 그때 고치 집과 비슷한 느낌이다. 어두운 분위기, 집 전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 고치에서처럼 아이가 낮잠을 자고 어서 나아졌으면 좋겠다. 집에 도착해 바로 아이에게 해열제를 주고, 가족 다 같이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나와 아내는 원래 1시간 정도 자고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거의 2시간 30분을 자고 일어났다. 두 녀 석도 비슷한 시간에 기상. 창 밖을 보니 어느덧 해는 지기 시작하고 있다. 밖에 나가야 할지, 아니면 그냥 집에서 쉬어야 할지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세현이 체온을 측정하니 다행히 열은 내렸다. 잘 자고 일어났는지 아이 컨디션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세현이에게 외출을 할 수 있겠는지 물으니, 아이는 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포르투에 왔는데 동 루이스 다리(Ponte Luís I)에 가보고 싶은 부모의 욕망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오후 5시. 마지막 남은 해열제를 먹이고, 아이 상태가 안 좋아지면 곧장 다시 들어오자는 다짐과 함께 길을 나선다. 숙소에서 동 루이스 다리까지도 걸어서 약 10분. 그러고 보니 숙소 위치가 정말 좋다. 그리고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점점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다리 위에선 유명인처럼 보이는 할머니의 사진 촬영도 하고 있다. 꽤 많은 촬영팀이 붙어 있는 걸로 봐선, 일반인은 아닌 듯 보인다. 할머니가 들고 계신 알록달록 풍선 덕에 아이들도 기분이 좋아지는 듯싶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의 다리 양 쪽 풍경은 정말로, 정말로 멋졌다. 아니, 멋지다는 단순한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간혹 사진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곤 한다. 지금이 꼭 그런 느낌이다. 사진으로도, 내 언어로도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아마 오늘이 긴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면, 또는 혼자 슬픈 노래를 듣고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세현이 몸이 괜찮았다면 다리 아래 넓게 펼쳐진 강가에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욕심부리고, 집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숙소 바로 옆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세현이가 점점 힘들어하는 눈치다. 그래도 장을 보고, 떨어진 해열제도 구하기 위해 마트에 가야 한다. 매트로를 이용해 다리 건너편 Camara de Gaia역에 있는 쇼핑몰(Pingo Doce Gaia Avenida)로 향했다. 마트 규모는 생각보다 컸고, 우리는 아이들 간식과 저녁으로 먹을 간편식 스파게티 등을 사서 집으로 복귀했다.
집에 돌아와 정말 빠르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일단 세현이 열이 내리고 컨디션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다. 설마 또 응급실에 가야 하는 상황은 안 벌어지겠지. 혹시 몰라 아이들을 깨끗하게 씻기고, 바로 잠자리에 눕혔다. 낮잠을 너무 오래 잔 탓인지 자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별 탈 없이 하루를 보내고 무사히 잠이 들어 얼마나 감사한지.
내일 리스본으로 가기 위해 짐 정리를 하고, 나와 아내도 침대에 누웠다. 포르투. 차가운 첫인상과는 다르게, 정말 멋진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강가 와이너리에도 가보고 싶었고, 번화가 구경도 하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과 지내며, 그리고 여행을 하며 빠르게 단념하는 법을 배운다. 아쉬움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훗날 더 멋진 포르투를 만나길 고대하며 오늘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