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 부장님
올해 처음 만난 부장님은 어쩐지 토란을 닮았습니다.
만지면 가렵고, 식감이 물컹거려 어쩐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토란이라 토란을 닮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장님은 긍정적인 인물에 가깝습니다.
그럼 왜 토란이냐?
단순하게 그냥, 토란을 닮았습니다. 감자랑도 비슷하지만 감자보다는 좀 더 작고 올망졸망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토란을 닮은 부장님입니다.
부장님은 저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는 사람이었어요.
굳이 부장님에 대해서 떠올려보자면, 조금 안쓰러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부장이라는 위치에서 버티는 것은 힘들어 보입니다.
토란 부장님보다 적어도 15년은 더 묵디 묵은 묵은지 같은 누나들의 숱한 무례한 말들을 견뎌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새파랗게 어린 토란 부장님이 아니꼬워 미칠 것 같나 봅니다.
어떤 날은 그들이 숨 쉬듯 뱉는 토란 부장님의 험담이 토란 부장님 귀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토란 부장님이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저분 참, 애쓰고 있구나 안쓰럽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토란 부장님이 어떤 사람이냐 물어보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그 모습이 떠올라
잘 모르겠지만 무지 애쓰고 있는 것 같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어제까지는요.
오늘부터는 토란 부장님이 어떤 사람인 것 같냐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그분은 어떤 면에서는 무척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오늘은 시끄러운 날이었습니다.
토란 부장님을 아니꼽게 생각하던 묵은지 누나 중 한 명이 저희 부서로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누나가 달려올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어요. 토란 부장님께 전화로 이미 욕을 잔뜩 퍼부은 뒤였으니까요.
제가 봤을 때, 아니 우리 부서 사람들이 보았을 때 묵은지 누나가 화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나는 푹 묵힌 묵은진데, 나처럼 숙성이 된 사람이 햇병아리들이랑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니? 였습니다.
결국 나는 일을 하기 싫다,를 주장하기 위해 묵은지 누나는 전화기를 집어던진 채 득달같이 쫓아온 것입니다.
햇병아리들은 숨죽이며 묵은지 누나의 절규와 비명 같은 목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묵은지 누나는 너무나 너무나 힘들고, 자기처럼 고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고되고 힘든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토란 부장님이니 어쩔 거냐고요.
누가 봐도, 그 누가 봐도 묵은지의 포악질이었습니다.
모니터 뒤에 숨은 저도 절로 끌끌 소리가 났어요.
그런데 그때요, 아주 놀라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네, 바로 토란 부장님의 목소리였어요.
아주 놀랍게도 토란 부장님은 묵은지 누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확인 못했습니다
라고요.
저는 그 말이 너무나, 너무나 놀라워서 모니터를 치우고 토란 부장님을 바라봤습니다.
씩씩 거리는 묵은지 누나 앞에, 사람 좋은 얼굴을 한 토란 부장님이 얼굴이 벌게진 채 사과를 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상황이 믿기질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묵은지 누나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으니까요.
그 누구라도 묵은지 누나를 향해 당장 여기서 나가라, 나잇값 좀 해라라고 소리를 질러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토란 부장님은 계속해서 묵은지 누나에게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계속해서요.
아니 어쩌면 토란 부장님은 회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무자는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러니 토란 부장님이, 난 몰랐다라고 해버렸다면 묵은지 누나는 그 실무자를 거의 반 작살을 냈을 겁니다.
하지만 토란 부장님은 실무자를 등으로 가린 채 연신 고개를 조아렸어요.
그랬더니 묵은지 누나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포악질을 하던 묵은지 누나가 갑자기 '흐이그~'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흐이그, 라니요?
마치 귀여운 동생을 다루듯이 말입니다. 분명 그런 소리를 냈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서운 속도로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냐고요?
토란 부장님은 묵은지 누나에게 앞으로 잘하겠다, 신경 쓰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묵은지 누나는 앞으로는 그렇게 해달라고 했고요. 이번에는 본인이 큰! 마음먹고 봐주겠다면서요.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사무실을 나간 묵은지 누나 뒤로, 부서원들의 짧은 탄성이 따랐습니다.
저 역시 허헉, 소리를 냈어요.
토란 부장님이 갑자기 엄청난 토란으로 보였거든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태풍이 아니라 햇볕이었다는 그 옛날 전래동화가 생각이나 웃음까지 났습니다.
묵은지 누나가 떠나자 부서원들은 토란 부장님을 일제히 쳐다보았습니다
토란 부장님은 그 시선을 느끼곤 슬쩍 웃어 보였어요
저는 그 미소를 보고 묵은지 누나를 향해 보인 토란 부장님의 모습이 엄청난 열연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묵은지 누나의 주장은 하나였습니다.
이 일을 하기 싫다! 왜 나에게 이따위 일을 시키냐! 였지요.
그럼 토란 부장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래도 이 일을 해줘야 한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다음은 고려해주겠다! 였겠지요.
만약 제가 부장이었다면
아 몰라요 알아서 하세요! 절차대로 처리한 것입니다. 어쩌라는 겁니까?라고 말했을 거예요.
그럼 상황은 더욱더 점입가경에 빠져버렸을 겁니다. 묵은지 누나는 아주 펄펄 뛰며 저를 잡아먹어버렸겠지요.
그런데 토란 부장님은, 자신을 기꺼이 낮추고 자존심 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굴었습니다.
토란 부장님은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로 묵은지 누나의 본심을요. 그건 바로 나를 선배로서 연장자로서 어른으로서 존중하며 공경하며 알아줘라 였습니다.
토란 부장님이 그걸 알아주자 묵은지 누나는 봄바람이 눈을 녹이듯 화를 풀었습니다.
자식, 내가 너그럽게 한 번 봐준다~앞으로는 잘해라 어?라는 식으로요.
저는 토란 부장님을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퇴근하고 반신욕을 하면서까지도요.
결국 저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만이 진짜 승리가 아닐 때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상대가 정말 원하는 본질을 만져주고
때에 따라서는 제 자존심을 잠시 접어줘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서 자존심은 꽤나 중요한 단어였습니다. 패배하더라도 자존심 하나는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제 자존심은 소중해요.
하지만 그 자존심이 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소중한 자존심을 지켜내야만 내 존재가 고고하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토란 부장님이 고개를 조아릴 때,
그 사무실 안에 있던 모든 부서원들은 (묵은지 누나 빼고)
토란 부장님을 비굴하다거나 없어 보이는, 패배자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토란 부장님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모든 부서원들이 우와, 탄성을 지르며 토란 부장님 처세술이 정말로 대단하시다 라며 연신 감격의 후기를 공유했거든요.
저는 줄곧 제 소중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뻣뻣한 태도로 상황을 대처했습니다.
그런 태도가 필요할 때도 있었습니다만은
종종 뻣뻣했던 제가 부러져버린 적이 많았어요.
인생을 조금 더 똑똑하게 사는 사람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서 문제를 부드럽게 만들 줄 알며 상대의 칼날을 부드러운 막대기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베어버릴 작정으로 칼을 갈며 덤비려던 상대도
상대가 부드러운 카스텔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머쓱해하며 자기 칼을 치우게 되니까요.
혹시 저처럼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뻣뻣하게 버티다가 부러지지는 않았습니까?
저는 힘을 좀 빼보려 합니다. 상대방이 스스로 쥔 칼을 부끄러워 내려놓게 만드는 바보 같은 카스텔라가 되어보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소중한 자존심까지 팽개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바보 같은 카스텔라를 연기할 뿐이니까요. 사회에서 사람들과 이리저리 섞여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연기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