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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맘 Mar 28. 2022

겹 복사꽃 아래엔

겹 복사꽃 아래엔 은방울 수선이 고개를 떨구고

봄이 시작되려는 무렵, 크로커스가 땅을 비집고 올라오던 때를 마지막으로 못 와봤으니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못 본 사이 베케 정원에는 이미 제대로 봄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정원의 색을 보며, 아직 목련이 지지 않아 참 반가웠다. 올해는 꽃봉오리만 관찰하다 놓쳤다며 망연자실했었기 때문이다. 정원으로 들어서니 놀라운 건 목련 뿐만이 아니다. 폭죽처럼 퐁퐁 터진 봄의 색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겨우내 유일한 꽃이던 수선화가 지고, 당근 이파리 같은 것만 늘어져있던 화단에는 앙증맞은 아주가와 무스카리가, 우아한 아네모네가 돋아있었다. 우리 정원에 심은 아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멋스럽게 자리 잡은 튤립들도 곳곳에 잘 어우러져있었다. 나참, 땅은 정말 새침데기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품고서 티 한번 내지 않은 채 꽁꽁 숨겨둘 수 있단 말인가?


오늘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제치고 이곳에 온 이유, 지난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은방울 수선의 자태가 궁금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아름다워 말도 안 나온다. 청초하다 곱다 우아하다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휘파람새 소리 같기도 하고 아가 눈가에 맺힌 눈물 방울 같기도 하고. 바람이라도 불면 저들끼리 소근소근 쫑알쫑알 아주 아름다운 난리다 난리.


정원사는 지나가며 말했다. 겹 복사꽃 아래 은방울 수선이 고개를 떨군 이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여러분 앉은 이 자리에만 하얀 눈이 내렸어요, 하하’

정원사는 시인이다 아름다움을 가꾸는 자라 그런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자라 그런가 표현도 참 아름답기도 하지, 정원사는 아이 같다.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 그런 말을 뱉고도 민망한 기색없이 천진하게 웃으며 제 갈길을 걸어가다니.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눈 내린 이 자리는 고요하다. 새들과 바람,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남아있다. 단돈 카피 한 잔 값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눈 앞에 눈 내린 정원만이라도 지금은 나의 정원이라 상상하며 이 기분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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